볼펜에 5만원짜리가?···조폐공사가 ‘돈 볼펜’ 파는 이유는?

2025-03-24

‘현금 없는 사회’ 성큼

지폐 발행량 10년 새 37% 감소

디지털 약자 소외 문제도

‘지폐 한 장이 볼펜 속으로.’

한국조폐공사가 지난 21일 화폐 부산물을 활용한 굿즈 ‘돈 볼펜’을 출시했다. 투명한 볼펜 안에는 1000원권, 5000원권, 5만원권 지폐를 만드는 과정에서 생긴 인쇄 불량품 등을 잘게 자른 종잇조각들이 들어가 있다. 볼펜에는 조폐공사의 화폐 부산물 굿즈 브랜드명인 ‘머니 메이드(Money Made)’라는 글씨가 각인돼 있다. 화폐 불량품과 여백지 등은 매년 500t이 발생하지만 대부분 소각 처리되면서 환경오염을 일으키고 폐기 비용도 생겼다. 이번에 이를 폐기 처분하지 않고 상품으로 재탄생시킨 것이다.

조폐공사는 지난해 국보 산수화인 겸재 정선 화백의 ‘인왕제색도’를 요판인쇄 기법을 활용한 요판화로 만들어 한정 판매했다. 요판인쇄란 5만원권 지폐를 만질 때 오톨도톨한 느낌을 내는 고도의 기법이다. 인왕제색도 요판화에도 화폐 제조에 쓰이는 보안기술을 접목해 오돌토돌한 느낌을 그대로 구현했다. 미술품 수집가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고 완판됐다.

화폐만 찍어내는 줄 알았던 조폐공사가 최근 다양한 사업을 벌이는 이유는 ‘현금 없는 사회’가 성큼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조폐공사 관계자는 25일 “예전엔 절대 민영화되지 않을 공기업으로 조폐공사가 꼽혔지만 화폐 발행량 감소로 한때 지속가능성에 대한 심각한 우려가 있었다”며 “지금은 우수한 보안 기술력을 바탕으로 문화와 수출 산업 분야로 지평을 넓히고 있다”고 말했다.

10년 만에 지폐 27%, 동전 98% 줄어든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현금 없는 사회로 진입한 나라 중 하나다. 한국의 현금 결제 비중은 10%에 불과하다. 무엇보다 현금을 찍어내는 양이 급감하고 있다. 조폐공사에 따르면 국내 지폐 발행량은 2015년 7억4000만장에서 올해 5억4000만장으로 10년 사이 37% 줄어든다. 동전은 2015년 6억2000만개에서 올해 1000만개로 98%나 급감한다.

조폐공사 전체 매출에서 화폐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줄고 있다. 공사 창립 당시인 1951년 100%였던 화폐매출 비중은 2000년 50.3%로 반 토막이 났고 2020년엔 20.4%, 지난해엔 17.2%로 줄었다. 조폐공사는 대신 모바일 신분증, 지역사랑상품권(지역화폐), 디지털 위조방지 기술 개발, 예술형 주화 등으로 사업 분야를 넓혔다.

한국뿐 아니라 전세계도 현금 없는 사회로 나아가고 있다. 핀테크기업 월드페이의 ‘2024년 세계 결제 보고서’를 보면, 2023년 전세계 현금거래 비중은 전체 결제의 16%였다. 월드페이는 2027년에는 현금거래 비중이 11%까지 줄어들 것으로 전망했다.

특히 노르웨이(현금결제 비중 4%), 스웨덴(5%), 중국(7%) 등이 현금 없는 사회를 선도하고 있다. 노르웨이에선 ‘빕스 모바일페이’를, 스웨덴에선 스위시(Swish)라는 모바일 결제시스템을, 중국은 알리페이나 위챗페이를 주로 쓴다. 반면 외국인 관광산업이 발달한 일본(41%), 태국(46%) 등에선 여전히 현금 결제비율이 높았지만, 이곳에서도 조금씩 그 수치가 줄고 있다.

현금 없는 사회는 시민의 일상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 서울시는 2022년 1월 18개 노선·400대에 도입했던 ‘현금 없는 버스’를 2023년 3월 108개 노선·1900대로 늘렸다. 인천·대전·대구·제주·광주 등도 현금 없는 버스를 전면 시행했거나 시행할 예정이다. 스타벅스는 2018년 ‘현금 없는 매장’ 시스템을 도입해 점차 확대하고 있다.

현금을 뽑을 수 있는 현금자동입출금기(ATM)도 줄었다. 유영하 국민의힘 의원실이 금융감독원에서 제출받은 자료를 보면, 국내 15개 은행의 ATM은 2019년 말 3만6000대에서 지난해 7월 2만7000대로 5년 사이 약 1만대 가까이 사라졌다.

현금결제 거부 사례도 늘고 있다. 한국은행의 ‘2021년 경제주체별 현금사용 행태 조사’를 보면, 2021년 상점과 음식점에서 현금결제를 거부당한 경험이 있다는 응답자는 전체 가구의 6.9%로 2018년(0.5%)보다 14배 가까이 늘었다. 거부 경험자의 64.2%는 카페 등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경험했다.

현금 없는 사회는 디지털 취약계층이나 저소득 노동자 소외 문제를 불러올 수도 있다. 팁 문화가 있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코로나19 대유행 시기 현금이 자취를 감추면서 팁 노동자의 수익이 급감했다. 화폐가 덜 쓰일수록 고령층, 장애인, 외국인 여행자, 불가피한 사정으로 신용카드를 쓰지 못하는 금융 취약계층 등이 불편함을 겪을 수 있다.

한국은행 경제연구원은 지난해 10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현금을 거부하는 상점 및 서비스의 비중이 2%라고 가정했을 때, 현금 의존도가 높고 디지털 이해도가 낮은 60대에서는 1%, 70대에서는 2.4% 소비자 후생이 감소한다고 분석했다.

이때문에 금융 취약계층에게 ‘현금사용 선택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한은은 ‘2024 현금사용 선택권 보장’ 자료에서 “누군가에게는 현금이 유일한 지급 수단”이라며 “재난 상황이나 통신장애 발생 등 비상 시에도 누구나 안전하게 사용할 수 있는 현금을 언제 어디서나 사용할 수 있도록 관심을 가져달라”고 당부했다.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