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마을 한글문학 기획전, 사라진 노래를 찾아 기록한 작곡가 한 야코브

2025-10-24

[전남인터넷신문]광복 80주년을 맞아 ‘역사마을 1번지’ 광주 고려인마을 산하 고려인문화관(관장 김병학)이 한 세기 동안 이어온 고려인 한글문학의 발자취를 되돌아보는 ‘한글문학 기획전’을 열고 있다.이번 전시는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 이후 중앙아시아 각지에서 고려인들이 한글로 써 내려간 문학 작품과 신문, 문예지를 한자리에 모아, 디아스포라 속에서도 꺼지지 않았던 언어와 정신의 불꽃을 조명하고 있다.

이와 더불어 고려인문화관은 고려인 음악사의 거목으로 평가받는 한 야코브 니콜라예비치(한야꼬쁘, 1943~2021)의 생애도 조명하고 있다. 그는 중앙아시아에서 잊혀져가던 고려인의 구전가요를 채록하고, 민족의 정체성을 음악으로 복원한 작곡가이자 문화 기록자였다.

1943년 카자흐스탄 심켄트에서 태어난 한 야코브는 1937년 스탈린의 강제이주로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고려인 2세대였다. 트롬본 연주자로 음악 인생을 시작한 그는 1960년대 후반 카자흐스탄에서 소련 최초의 재즈 빅밴드를 조직하며 금기된 음악의 경계를 넘었다. 그러나 그의 예술 인생의 중심에는 화려한 무대보다 ‘민족의 노래를 되찾는 일’ 이었다.

그는 수 년간 중앙아시아의 고려인 마을을 돌며 노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던 노래를 기록했다.

그가 채록한 주요 작품 〈망향가〉 – “물어보자 두만강아, 내 고향은 어디냐…” 〈떠나온 길〉 – 강제이주 열차에 오른 가족의 이별을 그린 서정가. 〈고려의 아침〉 – 낯선 땅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공동체의 신앙심을 노래한 곡. 〈우리의 이름〉 –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말자는 호소를 담은 합창곡 등은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 이주민의 눈물과 희망이 담긴 역사적 증언이었다.

한 야코브는 이를 악보로 정리해 훗날 카자흐스탄과 러시아의 예술학교에서 교육자료로 사용할 수 있도록 남겼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재소고려인의 노래를 찾아서 1.2〉는 음악을 넘어, 민족의 기억을 복원한 기록물이었다.

그의 대표작 〈고려 아리랑〉은 현재 광주 고려인마을 고려인문화관 관장으로 활동 중인 김병학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작품으로, 강제이주의 비극을 딛고 피어난 희망을 노래한다.

이 곡은 광주 고려인마을의 공식 행사와 중앙아시아 공연단의 무대에서 자주 연주되며, 민족의 혼을 이어주는 상징곡으로 자리했다.

또한 그의 음악은 세계적인 고려인 미술거장 문빅토르 화백의 예술세계와도 깊은 정신적 공명을 이루었다. 문 화백의 대표작 〈운명의 연대기〉, 〈달의 흔적〉, 〈수산시장〉에는 한 야코브의 선율처럼 흐르는 망명자의 기억과 시간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

두 예술가는 “고려인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는 정서를 서로 다른 언어로 같은 이야기로 전하고 있다.

2021년 9월,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세상을 떠난 한 야코브는 이제 없지만, 그가 남긴 노래는 여전히 살아 있다. 그의 음악은 단순한 예술을 넘어, 흩어진 민족의 기억을 하나로 잇는 다리로 남았다.

그가 생전에 남긴 “노래는 사람의 마음 속에 살아 있다. 마음이 남아 있는 한, 그 노래는 사라지지 않는다.” 는 말은 오늘도 후손들의 마음속에 조용히 살아 숨 쉬고 있다.

고려방송: 임용기 (고려인마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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