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1세대 글로벌 피아니스트였던 한동일 씨가 29일 별세했다. 83세.
고인은 한국이 전쟁으로 황폐해졌던 1954년, 13세에 미국으로 떠나 피아노 신동으로 불렸다. 한국의 첫 신동 피아니스트이자 첫 글로벌 음악인이었다.
유학을 떠난 계기도 특별했다. 1953년 고인이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본 주한 미군 사령관이 후원자를 자처하며 모금을 했다. 그렇게 5000달러를 모아 한동일의 유학 자금으로 보탰다. 한동일은 임기를 마친 미군 사령관과 함께 비행기를 타고 뉴욕에 도착해 줄리아드 예비학교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카네기홀 데뷔,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협연, 워싱턴 국립 오케스트라와 협연, 백악관 연주 등 한국인 음악가들에게 이정표가 되는 경력을 쌓았다. 1965년 레벤트리트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한국인 최초의 국제 콩쿠르 우승자로 기록됐다.
피아니스트 김대진(한국예술종합학교 총장)은 "진정한 1세대 피아니스트이자 선구자였다"고 추모했다. 구삼열 전 국가브랜드위원장은 “어려운 시절 우리 모두에게 희망과 자부심을 주신 상징이었고, 그가 있었기에 정트리오, 또 그 이후 한국 음악인들이 세계로 나갈 수 있었다”고 했다.
고인은 28세부터 미국 인디애나 음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후 텍사스와 보스턴 등에서 총 37년 동안 미국에서 교수 생활을 했다. 생전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그는 “20대 후반 즈음 연주가 무서워졌다. 물건을 들고 해외를 떠도는 세일즈맨이 된 기분이었다”고 했다. 대신 학생들을 가르치며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다. “학생 한 명 한 명이 레슨실에 찾아올 때마다 ‘이제 나도 가족이 생겼다’는 생각을 했다.” 1988년부터 고인에게 배웠던 피아니스트 이선경 국민대 명예교수는 "학생들과 인간적인 교류를 많이 하신 분"이라 기억했다.
미군의 도움으로 미국에 간 지 50년 만인 2005년 고인은 한국에 돌아왔다. 울산대학교, 순천대학교에서 석좌 교수를 지냈고 2012년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다 2020년 한국에 영구 귀국했다. 최근까지도 무대에서 연주해 올해 4월에는 대전에서 독주회를 열었고 그 영상이 유튜브에도 남아있다.
함경남도 함흥 태생으로 6ㆍ25 전쟁 때 피난을 온 고인은 고향을 꿈꾸며 살았다. 2019년 더하우스콘서트와 미니 토크에서 그는 “고향인 함흥에 가는 것이 인생의 마지막 꿈이다”라며 “피아니스트 아르투르 루빈스타인이 일제 시대에 기차를 타고 파리에서 부산까지 왔다고 했다. 나도 기차를 타고 파리까지 가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이며 미국에서 유족이 도착하기를 기다려 다음 달 1일부터 열린다. 발인은 다음 달 3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