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사당패 피겨스케이터’ 차영현 “빙상에 흐르는 전통 안무의 잔상, 보다 보면 빠져들 걸요?”

“제 취향이 마이너한가요? 아닌데···.”

차영현(22·고려대)에게 빙상은 무한하게 변주되는 놀이판이다. 남사당패가 공연하는 장터가 되기도, 승무를 추는 고요한 절이 되기도 한다. 이제는 낯설어진 한국 전통 안무를 널리 알리기 위해 차영현은 얼음 위에서 상모를 돌린다.

차영현은 2022~2023시즌 국제빙상경기연맹(ISU) 피겨 주니어 그랑프리 1차 대회에서 최종 2위에 오르며 메이저 대회 첫 메달을 땄다. 당시 그는 쇼트프로그램에서 슈베르트의 ‘마왕’, 프리스케이팅에서는 영화 <듄> OST에 맞춰 연기를 선보였다.

갈라쇼에서는 차영현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긴 생피지(상모에 달린 흰 끈)가 달린 ‘12발상모’를 흥겹게 돌린다. 올해는 승복을 입고 추는 전통 안무 승무를 새로운 작품으로 탄생시켰다. 차영현에게 빙상은 새로운 무대가 됐다.

차영현은 국가무형문화재 남사당놀이 이수자인 차창호의 아들이다. 차영현은 8월 28일 인터뷰에서 “어머니 배 속에 있을 때부터 남사당놀이를 보러 다녔다”라고 말했다. 차영현에게 남사당놀이는 인생이나 다름없다. 피겨스케이팅 선수로 활동하는 지금도 남사당패 공연을 병행하고 있다.

차영현은 자연스럽게 빙상에서 놀이판을 떠올렸다. 그는 “빙상장은 사람이 혼자 서 있기에 굉장히 넓은 무대다”라며 “12발상모나 승무의 장삼 등 전통 의상은 안무할 때 크게 펼쳐지기 때문에 피겨스케이팅의 동작과 어우러졌을 때 눈길을 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차영현은 “한국 전통 안무의 특징은 ‘잔상’이 있다는 것이다”라며 “탈춤의 한삼, 승무의 장삼 등 전통 의상을 입고 춤을 추면 관성 때문에 의상이 무대에 흐른다”라고 말했다.

차영현은 인터뷰 당일 12발상모 의상과 승무 의상을 준비해 빙상에서 안무를 선보였다. 회전축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생피지는 물론 커다랗게 나부끼는 장삼의 소매까지, 차영현의 말대로 흰 빙상에 강렬한 잔상을 만들었다.

유럽에서 시작된 피겨스케이팅과 한국 전통 안무는 이질감 없이 어우러졌다. 공중에서 몸을 회전해 착지하는 풍물놀이 동작인 ‘자반뒤집기’는 피겨의 구성 요소인 ‘버터플라이 스핀’과 닮았다. 빙판에 상체가 닿을 듯이 몸을 낮추어 활주하는 연결 동작 ‘하이드로블레이딩’은 정적이고 서늘한 승무의 이미지에 잘 들어맞는다.

시행착오도 여러번 겪었다. 차영현은 “처음에는 12발상모를 컨트롤하는 게 어려워서 안무를 하다가 생피지를 밟아 끝이 잘리기도 했다”라고 말했다. 그는 “남사당 공연은 연희자와 관객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서 생피지를 휙 던지면 관객의 시선도 덩달아 움직이게 할 수 있는데 스케이트장은 물리적 거리가 너무 멀어서 그게 어렵더라”라며 “그래서 버터플라이 스핀을 하면서 손에 쥐고 있던 생피지를 펼치는 식으로 동작을 바꿨다”라고 말했다.

차영현의 목표는 한국 전통 안무로 구성한 피겨 작품을 여러 개 모아 하나의 공연으로 기획하는 것이다. 남사당패 단원이자 피겨스케이터로서의 꿈이 여기에 모두 담겨 있다.

차영현은 “요즘 ‘케이팝 데몬 헌터스’ 같은 콘텐츠가 유행하면서 다시 한국 전통문화가 사랑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고리타분하다는 선입견도 많다”라며 “이렇게 멋있고 좋은 걸 더 알리고 싶다는 갈망이 늘 있었다”라고 말했다.

차영현은 “내 취향이 마이너한가 싶다가도 아닌데, 충분히 더 사랑받을 수 있는데, 라는 생각이 든다”라며 “피겨를 통해 전통 안무를 조금 더 캐주얼하게 보여준다면 이걸 보는 사람들이 빠져들면서 이 춤의 원류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차영현은 지금도, 앞으로도 ‘남사당패에서 줄 타는 피겨스케이터’다. 둘 중 어느 하나도 포기하고 싶지 않다. 그는 “두 가지 분야에 몸담을 수 있는 건 제가 가진 행운이라고 생각한다”라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