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주 캄보디아 범죄 사태 현지 취재를 위해 가방을 꾸리던 때였다. 별안간 아버지의 휴대전화 벨소리가 울렸다. 수화기 너머로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카드 배송기사’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주소도 다르고 ○○카드를 발급한 적이 없다”는 아버지의 말에 그는 카드사로 직접 문의해 보라며 전화번호를 알려줬다. 어딘가 수상해 아버지에게 전화를 끊으라고 하고 검색을 해봤다. 아니나 다를까 요즘 유행하는 보이스피싱 수법이었다.
이처럼 일상 속 깊숙이 파고든 피싱 범죄가 자행되는 범죄 단지(웬치·园区) 곳곳을 취재했다. 그중 ‘태자 단지’는 건물 6개 동에 약 3000명이 숙식할 수 있는 초대형 범죄 단지였다. 1층 상가에는 식당·미용실·병원 등을 갖췄다. 24시간 피해자의 돈을 빼앗기 위한 대본을 학습시키고 범행을 계획하며 실행하는 ‘종합범죄센터’로 진화한 형태였고, 순전한 악의로 가득한 곳이었다.

그러나 초국적 범죄 조직들의 범죄 단지 진화는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았다. 피싱 범죄는 말할 것도 없고 웬치 문제도 지난해 말부터 국내 언론을 통해 숱한 경고 신호가 울렸다. 수년 전 판결문에서도 범죄 단지의 구조와 감금·폭행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정부는 별 조치가 없었고, ‘대학생 고문 살해’라는 극단적 피해가 발생한 뒤에야 부랴부랴 합동대응팀을 꾸렸다. 범죄 단지 관계자조차 “3년째 이러고 있는데 왜 이제 와서 호들갑이냐”라며 의아해할 정도였다.
정부는 한국 청년 1000명 이상이 동남아 범죄 단지로 흘러갔다고 뒤늦게 파악했다. 국정원은 22일 “캄보디아 내 스캠 범죄 조직에 가담하고 있는 우리 국민의 규모가 최대 2000명에 이를 것”이라고 국회에 보고했다. 이 중엔 범죄인줄 알면서도 욕심 때문에 가담한 이들도 있지만, 한국에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손쉽게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유혹에 속아 넘어간 청년도 분명히 있었다. 스스로 갔든, 떠밀려 갔든 양측 모두 사회의 무관심 속에 이름도 생소한 동남아 지역의 범죄 단지에 합류해 감금·폭행까지 당한 게 현실이다.

범죄 단지는 사실 정부의 무관심을 먹고 자랐다. 목숨을 걸고 탈출해도 유일한 ‘비빌 언덕’인 대사관에 문전박대를 당하기도 했다. 피싱 피해 수사는 범인이 해외로 도주해 검거가 어렵다는 이유로 속속 중단됐다. 피싱 범죄 피해액은 올해 사상 처음 1조원을 돌파할 전망이다. 문제 해결에 골몰할 시간도 모자란 데 정치권은 “캄보디아에 군사적 조치를 해야 한다”며 외교 문제로 비화할 발언을 일삼거나, “문신한 범죄자를 구해왔다”며 ‘진짜 피해자’ 정쟁에 골몰한다.
그 틈에서 진짜 피해자는 피눈물을 흘리고 있다. 대구에 사는 피싱 피해자 60대 현모씨는 지난해 3월 리딩방·보이스피싱 범죄를 연달아 당했다. 30년간 택시 기사를 하면서 모은 1억원은 모두 캄보디아 범죄 조직에 흘러갔다. 지난 7월 피싱 범죄를 보도한 중앙일보 기사에 현씨가 서툰 타자 실력으로 “자살·파산…삶을 앗아가는 범죄입니다. (…) 특별법이라도. 만들어…리딩사기범을. 최고형량을”이라고 남긴 댓글엔 그간의 처절함이 담겨 있다. 현씨는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피싱 범죄는 기시감이 커서 수사 기관이나 여론의 관심을 못 받는데 이번이 예방책을 세울 천금 같은 기회”라고 호소했다.

피싱 범죄도, 범죄 단지 감금·폭행도 이제는 뿌리를 뽑겠다는 각오로 대처해야 한다. 날로 진화하는 범죄 단지의 규모와 시스템은 부처 간 태스크포스(TF) 구성 같은 기존 문법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신속 대응 체계 구축이나 인력 강화뿐 아니라 피싱범죄수사청 설립 등 파격적인 방책도 이번 기회에 논의해 볼 수 있어야 한다. 범죄 조직은 지금도 새로운 웬치로 근거지를 옮기고 있다. 지금까지처럼 흐린 눈을 하면 또 다른 피해가 양산된다. 그전에 온 사회가 눈을 부릅떠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