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국왕 찰스 1세가 전쟁 비용 충당을 위해 막대한 세금을 부과하려다 의회파 등의 반란에 직면했다. 당시 1644년 8월 옥스퍼드의 성모 마리아 교회에서 폴 고스놀드 목사는 반란 세력을 겨냥해 ‘온건한 군주제’를 광기 어린 ‘카키스토크라시(kakistocracy)’로 전락시키려 한다고 비판했다. 카키스토크라시는 어리석고 저열한 사람들의 통치를 뜻한다. 최악을 뜻하는 그리스어 ‘카키스토’와 정치를 의미하는 ‘크라시’를 합친 말이다. 19세기까지 영미권의 보수적 귀족·지식인들은 엘리트 계층의 통치와 대비되는 중우정치의 미숙함을 비꼬는 데 이 말을 썼다. 20세기 이후에는 무능하고 부패한 정치 세력을 비판하는 시사용어로 쓰이고 있다.
내년 1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을 앞두고 영미권에서 카키스토크라시가 키워드로 떠올랐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29일 ‘2024년의 단어’로 카키스토크라시를 꼽았다. 해당 단어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이 성 매수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극우주의자 맷 게이츠를 법무부 장관 후보로 지명한 이후 구글 검색 순위 2위까지 급등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도 이달 9일 뉴욕타임스(NYT) 칼럼에서 “대중들은 이제 더 이상 국정을 운영하는 사람들에 대한 믿음이 없고, 그들이 정직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며 미국 등의 정치 상황을 ‘카키스토크라시’로 진단했다.
근래에는 부패한 권력을 빗댄 ‘클렙토크라시(kleptocracy)’도 주목받고 있다. 절도를 뜻하는 그리스어 클렙토마니아(kleptomania)가 합성된 용어다. 카키스토크라시가 주로 서방국가의 정치 퇴행을 비판하는 데 활용되는 반면 클렙토크라시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을 비롯한 비(非)서방 권위주의 국가의 권력형 부패를 지적하는 데 주로 쓰이고 있다. 한국도 불법 비상계엄에 따른 국헌 문란 사태, 끝없는 사법 리스크에 휩싸인 정치권의 극한 대결 속에서 정국 혼란이 증폭되고 있다. 시급히 자유민주주의, 법치주의 등 헌법 질서를 복원하지 못하면 우리도 카키스토크라시·클렙토크라시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