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타고 나서 여기는 그대로야. 겨울에는 춥고, 여름에는 덥고. 에어컨도 다 타서 이제 없어.”
지난 24일 찾은 서울 중구 후암로의 한 ‘쪽방 건물’에서 만난 강모씨(73)가 방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휴대용 가스버너를 꺼내 보였다. 강씨는 “버너라도 방에서 사용하지 않으면 겨울에 추워서 잠을 잘 수 없다”고 말했다. 나무로 된 방문에는 바람을 막기 위해 색색의 스티로폼이 여러 겹 붙어있었다. 지난해 3월20일 이 건물 303호에서는 화재가 발생해 거주하던 두 명이 숨졌다. 쪽방촌 주민들은 지난해 화재 사고의 원인이었던 가스버너를 여전히 방 안에서 사용하고 있었다.
쪽방에는 보일러 등 난방설비가 없어 보온용으로 가스버너를 쓰곤 한다. 방 안에서 가스버너로 조리하는 일도 흔하다. 지난해 숨진 이모씨도 방 안에서 버너를 자주 사용했던 것으로 전해졌으며 버너 사용이 화재의 원인으로 추정됐다. 임명환씨(65)는 “도시가스가 들어오지 않다 보니 이번 겨울에도 내내 부탄가스를 썼다”며 “지난해랑 똑같이 사용하고 있으니 위험하다는 생각도 든다”고 말했다. 이 건물 3층에 사는 김모씨는 “(가스버너가) 위험하다고는 하지만 방법이 없다”며 “온수도 안 나오는데 밥 해 먹으려면 이거라도 써야 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지난해 화재 후 환경은 더 열악해졌다. 화재로 공용 에어컨이 소실됐는데 다시 설치되지 않아 이 건물 입주자들은 다가올 여름을 걱정하고 있었다. 세탁기도 마찬가지로 불타버린 후 1년간 다시 들여놓지 않고 있다. 입주자들이 공동으로 쓰던 세탁기 자리에는 양동이와 수도 배관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강씨는 “겨울이면 찬물에 손빨래한다. 세수와 면도를 하러 온수가 나오는 남산 공공 화장실까지 가기도 한다”라고 말했다.

1년여전 화재가 발생했던 303호 천장에는 너비 1m의 그을린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검게 탄 벽을 가리려 페인트를 칠했지만, 페인트가 미처 덧칠해지지 않은 경칩 사이로 거무스름한 그을음이 보였다. 건물 입구에 붙여진 화재대피도에는 파란 보드마카로 303호에 ‘X’자가 표시되어 있었다. 303호에는 새 거주자가 들어와 살고 있다.
주민들은 “몇 차례 공무원들이 현장을 다녀갔지만, 개선된 것은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복도에 소화기와 소방키트(간이 소화기와 방화포 등이 들어있는 가방) 두 개가 비치되어 있을 뿐이었다. 지난해 현장에서도 소방키트는 사용한 흔적 없이 현장에 그대로 놓여있었다. 강씨는 “사고 직후에는 여기 와서 사진을 찍고 반짝 관심이 있는데, 그때뿐”이라며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중구청은 ”시설이 열악해서 한계가 있다”며 “소방당국과 합동으로 정기적 점검을 하고 있고, 정기적으로 심리 안전 상담도 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동현 홈리스행동 활동가는 “한파대피소로 보내고, 목욕권 줘서 목욕탕으로 보내는 단기적 정책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라며 “중장기적으로는 공공 영역에서 주택을 지어 이주하도록 하는 주거 상향 정책이 필요한데, 정부나 지자체에서는 급하지 않은 문제로 치부하니 땜질 식 단기 정책만 반복되고 있는 상황”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