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시조 백일장 - 10월 수상작] ‘두 얼굴의 자아’ 보이듯 그려낸 시어의 힘

2024-10-27

장원

자화상의 오른쪽

김수지

내 안의 반대편은 무서울 때가 있다

범람하면 폭발하는 억압된 마지노선

어둠을 손에 쥔 악마 그 모습 들어 있다

상처 난 화가들의 자화상이 말해주듯

아픔을 펴 바르면 표정은 다시 살아나

저 혼자 감옥 안에서 색깔을 바꿔 간다

그럴듯한 본 모습 착하게 그리다가

이젤 앞에 부딪쳐 굳어버린 웃음들

서로는 두 개가 되어 바른쪽만 덧칠한다

차상

망자를 위한 꽃

최지윤

사람보다 먼저 온 꽃을 조문한다

만발한 웃음 뒤엔 쓸쓸한 형용사

어여쁜 죄가 있어 늘 꺾이고야 마는 생

잔치집 초상집 하루가 멀다 하고

들러리 서다 보면 서러운 눈물 뿐

짧은 명, 고운 게 죄라서, 품은 게 향기라서

통곡이 시들 즈음 표정도 시들어

저무는 장례식 하나 둘 폐기 되는

시선들 낯설디낯선 부음 앞에 바쳐진

차하

인력시장

최태식

마트 앞 행사 상품 바나나가 변해간다

손 닮은 모양으로 손 타기를 기다리는데

며칠째 잡아주지 않아 생기는 슈가포인트

허탕 치는 날들은 까맣게 표시되고

미끄럽게 살아와 비틀대는 내 모습

얇아진 껍질의 하루 내일은 선택될까

엄지손 치켜들고 배웅하던 늦둥이

그 얼굴 너무 달아 몸값 낮춰 내놔도

싱싱한 옆자리들만 쏙쏙 팔려나간다

이달의 심사평

조락의 계절이다. 길섶의 풀들은 피돌기가 느려지고 옷섶을 파고 드는 한기에 몸이 저절로 움츠러든다. 마치 마음 변한 애인처럼 유래없는 폭염이 가시자 마자 기다렸다는 듯 안면을 차갑게 바꾼 계절이 당도했다. 이달에도 여전히 시조의 형식을 제대로 숙지하지 못하고 투고한 작품이 종종 눈에 띄어 아쉬움이 남았다.

10월 장원은 한 해의 막바지로 가는 이 계절에 어울리는 김수지의 ‘자화상의 오른쪽’을 올린다. 화가들이 그린 자화상에는 대부분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고독한 자신의 모습이 드러난다. 장원으로 선한 ‘자화상의 오른쪽’은 두 얼굴을 가진 고뇌하는 자아가 선자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정형률 또한 거슬림이 없었다. 더불어 시어를 밀고 나가는 힘이 어떤 믿음을 주었다. 같이 보내온 두 편 모두 상당한 시간 습작에 공을 들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차상으로는 최지윤의 ‘망자를 위한 꽃’을 선했다. 무심히 지나치기 쉬운 일상에서 시를 건져 올리는 눈이 예사롭지 않았다 ‘낯설디 낯선 부음 앞에 바쳐진’이나 ‘만발한 웃음 뒤엔 쓸쓸한 형용사’는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절구였다. 삶과 죽음이 갈라지는 장례식장의 표정을 읽어내는 눈이 슬프고 예리했다.

차하에는 최태식의 ‘인력시장’을 올린다. 마트에 진열된 바나나를 인력시장에 비유해서 쓴 작품이다. 신산하고 무거운 우리네 삶을 예리하고 기발한 눈으로 관찰해서 작품을 건져올렸다.

배순금의 ‘물 들이다’와 전형우의 ‘충돌이 스며들다’ 고관희의 ‘우저서원의 가을’에도 오래 눈길이 머물렀음을 밝히며 정진을 멈추지 않길 바란다.

심사위원 서숙희 정혜숙(대표집필)

초대시조

서걱이다

이은정

너와 나 사이에 서걱이는 그 무엇은

색색의 마음 닮은 낙엽이 그러하듯

속이 빈 현악기처럼 아픈 소리를 낸다

가을은 잔물결로 속삭이는 실비로

그렇게 다가와 스치듯 지나가고

잠깐만 한눈팔아도 나를 잃어버린다

너와 나 사이에 뜨겁던 사랑도

몇 번의 이유 없는 소리로 서걱거렸고

우리가 하나일 때도 가을은 가끔 슬펐다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더니 비가 쏟아진다. 가을비다. 이 비가 그치면 또 무엇이 우리를 덮칠 것인가. 생활의 깊은 골짜기로 또 어떤 무늬들이 만들어질 것인지. ‘속이 빈 현악기처럼 아픈 소리를 내’며 낙엽이 떨어지고 ‘잔물결로’ ‘속삭이는 실비’로 가을은 올 것이다. 계절은 ‘그렇게 다가와 스치듯 지나가고’ ‘잠깐만 한눈팔아도 나를 잃어버리’고 마는 생활의 단면들이 가을에는 더 스산하게 다가온다.

‘너와 나 사이의 뜨겁던 사랑도’ ‘이유 없는 소리’로 부딪치고 ‘우리가 하나일 때도’ ‘가을은 가끔 슬펐다’ 라고 시인은 우리들의 가슴 깊이 스미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묘사와 비유를 통해 밀도있게 구축하고 있다. 인간관계의 부딪침을 ‘서걱이는 그 무엇’으로 모호함을 드러내지만 그것은 종장의 ‘속이 빈 현악기’로 구체화 하기 위한 포석이다. 스산한 감정들을 ‘서걱인다’라는 청각적 이미지를 가져와 서정적 흡인력을 높이고 있다.

가을에는 누구나 서정시인이 되고 우울과 낭만의 감성에 빠지게 된다. 겨울의 문턱에서 차 한잔을 앞에 두고 그동안 힘들었던 일들을 반추하면서 이 작품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슬픔이라는 감정이 스며들면서 옷깃을 여미게 되지 않을까.

시조시인 정혜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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