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말 없이 떠난 컬렉터

2024-10-27

최근 열린 한 메이저 경매에 이중섭의 ‘닭과 가족’이 출품됐다. 이중섭의 마지막 전시인 1955년 미도파 화랑 개인전 때 첫선을 보였고 탄생 100주년 기념전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이중섭, 백 년의 신화’에서 대표작으로 꼽힌 작품이다. 그림은 경매에서 새 주인을 찾지 못했다. 2022년 3월에도 경매에 나온 적이 있으나 연거푸 임자를 만나지 못하니 더욱 애석했다.

이중섭의 ‘닭과 가족’을 오래 품었던 주인은 대우그룹 부회장을 지내고 ㈜대우까지 이끈 고(故) 이우복(1936~2024) 회장이다. 지인들에 따르면 5월 5일 별세했다고 하나 부고를 내지 않았다. 그는 친구 김우중과 대우그룹을 세웠고 안주인 역할을 도맡아 1970~1990년대를 관통하며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기를 이끌었다. 일반인에게 그는 기업가지만 문화계에서 이우복은 온 나라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 컬렉터였다.

별세 사실을 알리지 않은 그의 부재를 그림들이 알려줬다. 지난달 코엑스에서 열린 ‘2024 프리즈 서울’에 참가한 학고재갤러리 부스에 김환기의 1951년작 ‘피난열차’가 걸렸다. 의미 있는 미술관 전시에는 흔쾌히 작품을 빌려줬기에 잘 알려진 이 회장의 소장품이다. 청천(靑天)과 적토(赤土)를 가르며 달리는 전쟁통 피난열차는 한 사람이라도 더 태우기 위해 절박하다. 어찌나 많이 태웠던지 사람들이 기차 지붕 너머로 넘쳐나는데 그 모습이 꼭 넘치게 담은 밥그릇마냥 소복하다. 이 회장은 생전에 쓴 수필집 ‘옛 그림의 마음씨’에서 이 그림을 “세월이 흘러도 결코 퇴색하지 않는 전쟁의 비극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작품이며 그 안에 “생명의 참 의미를 깨친 화가 수화 (김환기)의 맑은 심성이 담겨” 있다고 적었다.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가치를 지닌 도자 컬렉션 487점은 이상준 더프리마 회장에게 맡겼다. 도자 수집의 철학이 확고하고 이를 더 발전시킬 적임자를 찾은 지 딱 1년 후, 고인은 눈을 감았다.

“그림은 두 번 태어난다. 화가의 손에서 한 번, 그리고 컬렉터의 품 안에서 또 한 번.” 이렇게 말한 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그림이 화가의 작업실에서 태어나 미술관에 걸리기까지 겪는 기나긴 여정을 생각해볼 때 컬렉터는 작품의 두 번째 창조자”라고 덧붙였다. 오늘날 우리가 미술관에서 마주하는 명작들은 애호가들에 의해 선별된 극히 일부의 작품들이니 그만큼 컬렉터의 역할이 중요하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작품들의 새 안식처를 찾는 일에 주력했던 이 회장은 참으로 조용했다. 컬렉터를 과묵하게 만든 것은 사회적 분위기다. 미술품 수집을 재테크나 탈세로 치부하거나 작품 구입비를 검은돈으로 인식하는 편견 말이다. 이 회장은 뛰어난 표현력으로 정평 난 겸재 정선의 ‘박연폭포’와 여러 도자기를 소장했으나 국가문화유산으로 지정 신청을 하지 않았다. “개인 소장품의 값을 높이려는 것”이라는 억울한 소리를 듣기 싫어서였다고 한다. 인식과 제도, 모두 개선이 필요하다. 문화유산의 해외 반출에 대한 보호법이 소폭 개정되기는 했으나 여전히 발목을 잡는다. 이 회장은 과거 장욱진의 1949년작 ‘독’을 오래 소장했는데 복원을 위해 프랑스에 보내려다 애를 먹었다. 일본에서 환수한 도자기를 돌려보내 수리해 오는 일은 아예 불가능했다. 어렵사리 미술품과 문화유산 상속에 대해 미술품 물납으로 상속세를 대신 낼 수 있게 법이 제정됐고 최근 그 1호 물납 작품들이 국립현대미술관에 입고됐다. 하지만 물납제가 미술품과 문화유산에 대한 상속분으로 제한돼 있고 절차도 복잡해 활성화가 요원하다. 자산 상속 전반에 대한 확대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컬렉터 세대교체의 시기다. 특히 ‘전쟁세대’ ‘산업화 이전 세대’로 불리는 기성 주요 컬렉터들이 상속을 준비하는 시기임을 유념해야 한다. 한국 근대미술의 가장 큰 후원자들이었던 그들의 소장품을 헛되이 흩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국고로 받아들이거나 더 많은 국민들이 박물관·미술관 전시로 향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은 이 회장을 두고 “뛰어난 애호가는 말 없는 미술사가”라 했다. 높은 안목으로 뛰어난 우리 문화를 지켜낸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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