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살 룸살롱 여종업원 외박 거부하자 10대 4명 보복 살해

2024-12-17

구로서 살인 후 도주…체포 21개월만에 교수대 올라 [사건속 오늘]

주범 김태화 23세 사형 집행…1~3심 확정판결까지 11개월 17일 불과

불과 33년 전만 해도 법 세상은 지금과 크게 달랐다.

한국은 사실상 사형제도가 사라진 국가가 됐지만 1991년엔 이렇게 빨리 교수대에 올려보내도 될까 싶을 정도로 사형집행이 빨라도 너무 빨랐다. 범인을 체포한 지 1년 9개월, 21개월 만에 사형을 집행했을 정도였다.

재판 역시 속전속결로 진행됐다. 지금은 법원도 재판에 치여 기일이 늘어지기 일쑤였지만 1991년 그때는 체포된 뒤 1심, 2심, 3심인 대법원 사형 확정판결까지 걸린 시간은 11개월 17일에 불과했다.

수감 중 기독교에 귀의한 20대 사형수들…"피해자들에게 미안합니다, 모두 예수 믿고 구원받기를"

1991년 12월 28일 오전, 25살 조경태(1966년생)와 23살 김태화(1968년생)는 나지막이 찬송가를 부르며 서울 구치소 사형집행실로 들어섰다.

조경태는 사형집행실 앞에 모인 검사, 의료진, 교도관들에게 "피해자들에게 위로를 빕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 하늘나라에서 만나길 바랍니다"며 전도의 말을 했다. 아울러 "죄를 짓고 왔지만 이곳에서 하나님을 알게 된 것을 큰 보람으로 생각하며 자매님들께 감사드린다"며 자신을 전도한 교화 봉사자들에게 인사의 말을 남겼다.

김태화도 "피해자 가족에게 죄송합니다. 예수를 믿게 해준 고마운 자매님께 안부 전하며 목사님께 감사드린다"며 고개 숙인 뒤 찬송가 3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부르면서 사형대 의자 앞으로 걸어갔다.

구정 다음날 룸살롱 찾은 조경태와 김태화, 외박 거절했다며 '살인 예고'

조경태와 김태화는 10대 때인 1985년 3월, 특수강도 혐의로 5년 형을 선고받고 인천 소년교도소에서 복역하다가 1989년 5월 석가탄신일 특사(가석방)로 풀려난 뒤 1990년 3월 초까지 채 10개월도 되지 않는 기간 동안 2건의 살인(5명 살해), 26건의 강도, 3건의 차량 절도 등 모두 42건의 범죄를 저질렀다.

이들의 이름이 언론에 등장한 건 1990년 1월 29일 새벽 1시쯤 서울 구로구의 한 건물 지하 1층 샛별 룸살롱에서 10대 4명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달아난 뒤.

이들은 구정 다음날이었던 1월 28일 밤 9시쯤 룸살롱을 찾아 술을 마시다가 나간 뒤 자정이 다될 무렵 다시 돌아와 A 양(16)에게 "2차를 나가자"며 외박을 요구했다.

하지만 A 양이 "나는 남자친구가 있고 2차는 나가지 않는다"고 거절하자 김태화가 A 양 뺨을 때렸다. 소란에 룸으로 달려온 업소 사장 E 씨가 "이러지 마시라"고 말리자 조와 김은 목을 손으로 긋는 시늉을 하면서 "두고 보자"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룸살롱 사장, 불길한 마음에 퇴근 20분 뒤 전화 걸었지만 무응답…

E 씨는 설연휴에도 돈을 벌어보겠다며 나온 여종업원 A 양, B 양(18)과 A 양의 남자 친구이자 잔심부름을 하던 C 군(15)에게 "밤이 늦었으니 이제 정리하자, 문단속 잘하고 자라"라는 당부를 남기고 1월 29일 새벽 0시 30분 가게를 떠났다.

업소 부근 자택으로 간 E 씨는 1시간여 전 소란이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0시 50분쯤 룸살롱에 전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불길한 마음에 C 군 친구로 인근 당구장에서 일하는 D 군(16)에게 전화해 "가게로 한 번 가 달라"고 부탁했다.

D 군에게도 아무런 연락이 없어 불안해 하던 E 씨는 '모두 살해당했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들었다.

룸살롱 바로 위층인 1층에서 카페를 운영하던 F 씨가 새벽 1시쯤 가게 안 내실에서 잠을 청하려던 순간, 지하 1층에서 터져 나온 비명을 들었다.

놀란 F 씨는 옷을 챙겨입고 평소 자주 들렀던 지하 1층 샛별 룸살롱으로 들어갔다가 혼비백산, 경찰 신고와 함께 E 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잔인해도 너무 잔인했던 10대 4명 살해…여종업원 2명은 알몸으로 피살

현장에 출동한 형사들은 지독하게 잔인한 사건 현장을 보고 눈을 돌리고 말았다.

10대 여종업원 A, B 양은 모두 알몸 상태로 난자를 당한 채 쓰러져 있었고 C 군과 사장 부탁으로 친구를 보기 위해 왔던 D 군 시신도 처참했다.

A 양은 가게 출입구 바깥에 알몸 상태로 신음하고 있었다. 경찰은 우선 A 양을 서둘러 병원으로 옮겼지만 이송 도중 숨을 거두고 말았다.

경찰은 룸살롱 벽 여기저기, 바깥으로 나가는 계단과 계단 옆 벽에 피해자들이 남긴 핏자국을 볼 때 '도망치려다 끌려 내려와 또다시 흉기에 찔린 것'으로 판단했다.

동일 수법 전과자 사진 대조 끝에 조경수, 김태화 특정…27일 前 광주 살인사건으로 지명수배

경찰은 업주 E 씨가 "사건 직전 난리를 친 스포츠형 머리를 한 20대 2명이 범인인 것 같다"라는 말에 20대 동일 수법 강력범 얼굴 사진을 모두 갖고 와 하나하나 대조했다.

그 결과 E 씨가 조경수와 김태화를 "바로 이놈들이다"고 찍자 형사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불과 27일 전인 1월 2일, 광주에서 술집 여종업원을 살해한 혐의로 전국에 지명수배된 그들이었기 때문이다.

경찰은 수사본부를 설치하고 1월 30일 전국에 지명수배하는 등 조경수, 김태화 검거에 총력전을 펼쳤다.

전국 지명수배 중에도 강도행각, 주로 여성만 있는 미용실 노려…신고 막기 위해 옷 벗겨

조경수와 김태화는 대전과 수원에 각각 셋방을 얻어 도피행각을 펼치다가 1주일 만에 돈이 떨어지자 다시 서울로 올라와 강도질로 도피자금을 마련하는 행각을 되풀이했다.

그들은 주로 퇴근 시간대 미용실을 노렸다. 대부분이 여성 손님인 까닭에 제압하기 쉬웠고 퇴근 시간을 틈타 도망치기도 수월했기 때문이다.

2월 6일 오후 6시 최대 번화가인 서울 명동의 한 미용실에 마스크를 쓴 채 들어가 손님과 여종업원을 대기실로 몰아넣은 뒤 옷을 벗기고 금품을 모두 털었다. 옷을 벗긴 것은 달아날 때 최대한 시간(경찰 신고까지 시간이 걸리도록)을 벌기 위해서였다.

이런 식으로 턴 미용실이 무려 25곳에 달했다.

권총 찬 잠복 형사 따돌리고 애인 불러내 도주…부동산 중개업소 전수조사 끝에 조경수 검거

조경수와 김태화에 의해 경찰 체면이 여지없이 깎인 일까지 발생했다. 범인이 무장 경찰을 뚫고 나타나 애인을 데리고 유유히 사라진 것.

경찰은 조경수가 구로구 가리봉동의 카페에서 일하고 있는 애인 이 모 씨(21)를 분명 찾을 것으로 판단, 이 씨에게 "계속 근무 좀 해달라"고 요청한 뒤 주변에 권총을 찬 형사 6명을 잠복근무시켰다.

그러던 중 2월 26일 조경수가 선글라스를 낀 채 카페에 들어와 애인 이 씨를 데리고 나가 버렸다.

조경수는 카페에 들어와 주문하는 척하면서 다른 종업원에게 "이OO을 밖으로 좀 불러달라"고 말한 뒤 나갔다. 동료 전갈을 받은 이 씨가 나오자 조경수는 이 씨와 함께 미리 대기해 놓은 차를 타고 달아났다.

조와 대전으로 내려가 4박 5일간 머물던 이 씨는 경찰이 자신을 찾고 있다는 말에 3월 2일 서울로 올라와 경찰서를 찾았다. 이때 이 씨는 "기차를 타고 함께 서울로 오던 조경태가 평택에 내렸다"고 말했다.

경찰은 수도권 일대 형사들을 총동원, 평택과 인근 수원을 뒤졌고 '월세방을 구했을 것'으로 보고 부동산 중개소 전수 조사까지 펼쳤다. 그러던 중 수원시 권선구 세류동의 한 부동산 중개소로부터 '조경수와 비슷한 인물을 봤다'는 신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 조경수를 검거했다.

김태화 "체면 안 선다"며 현상금 인상 요구…언론사에 전화 "단독 주겠다, 나랑 인터뷰"

조경수 검거 소식을 접한 김태화는 3월 9일 오전 서울경찰청 형사과장 최중락 총경에게 "다음과 같은 요구조건을 들어주면 자수하겠다"고 전화를 걸었다.

'수사반장'에서 최불암이 연기한 실제 모델로 유명한 최 총경에게 김태화는 △ 현상금이 적어 체면이 안 선다며 현상금을 1000만 원에서 3000만 원으로 올릴 것 △ 자수한 뒤 현상금 중 2000만 원은 인천소년교도소, 1000만 원을 광주소년교도소에 기부할 것 △ 자수시 '형량 감경 규정'을 적용해 줄 것 △ 조경수와 육성 통화를 하게 해 줄 것 △ 조건을 모두 들어줄 경우 오늘 밤 자수하겠다고 요구했다.

이에 최 총경은 "현상금은 상부와 건의하겠으며 나머지는 즉각 들어 주겠다"고 달랬다. 이어 조경수를 형사과장실로 급히 불러 김태화와 3분간 통화토록 했다.

조경수와 통화를 마친 김태화는 무슨 생각인지 3월 9일 오후 한 언론사에 "단독을 주겠다, 인터뷰하자"고 전화를 걸었다.

반신반의한 기자는 '서울 종로 000레스토랑에서 보자'고 한 뒤 이를 경찰에 알렸다.

즉시 경찰은 김태화가 눈치채지 못하는 선에서 OOO레스토랑 주변을 에워싸고 레스토랑 안 구석구석에 형사를 배치했다.

김태화 "내가 3명, 조가 1명 죽였다, 밀고한 부동산 죽이려 갔지만 애들이 있어"

3월 9일 오후 레스토랑에 들어서던 김태화는 무술 경관들에 의해 검거됐다.

김태화는 경찰 조사에서 "조경수 월셋집을 경찰에 밀고한 수원 세류동 부동산 업소 사장을 죽이려 흉기를 가지고 3월 7일 오전 9시쯤 찾아갔지만 어린이 2명이 있어 그냥 돌아왔다"고 진술, 자칫하면 희생자가 6명으로 늘어날 뻔했다.

그러면서 "내가 남자 둘과 여자 한 명을 죽였고 조경수가 여자 1명을 살해했다"고 밝혔다.

10대 유흥업소 근무 사회문제화…일부 학교, 야간 아르바이트 금지령까지

조경수, 김태화에 희생된 룸살롱 여종업원이 10대라는 사실이 알려져 사회 문제화가 됐다.

이에 일부 고등학교는 야간 아르바이트 금지령까지 내렸고 학교장에게 '유흥업소 근무 여부를 알아보라'는 교육 당국의 은밀한 지시도 있었다.

또 숨진 A, B 양이 가출 청소년이었던 점을 중시해 관련 부처가 가출 청소년 선도 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1~3심 모두 사형…김태화 체포에서 사형 확정까지 11개월 17일

조경수, 김태화 재판은 일사천리로 진행됐으며 1심, 항소심, 상고심 모두 "범행 수법이 너무 끔찍해 달리 용서할 길이 없다"며 사형을 선고했다.

김태화가 검거된 뒤(1990년 3월 9일) 대법원 확정판결(1991년 2월 26일)까지 걸린 시간은 단 11개월 17일에 불과했다.

사형 확정 9개월 22일 만에 교수형…김태화는 만 23세 생일 17일 뒤 형장의 이슬로

이들은 사형 확정판결을 받은 9개월 22일 뒤인 1991년 12월 18일, 다른 사형 대기수 7명(총 9명)과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김태화(1968년 12월 1일생)는 만 23세 생일을 서울 구치소에서 맞은 17일 뒤 교수대에 올라 역대급 어린 사형집행수 기록을 남겼다.

지금까지 가장 어린 사형 집행수는 1989년 대구 교도소에서 사형에 처해진 이우영으로 당시 만 21세였다.

<뉴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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