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남부 툴루즈의 블라냐크 공항 활주로엔 A330-743L가 항상 주기돼 있다. 지난 4일(이하 현지시간) 전체 A330-743L 6대 중 4대가 블라냐크 공항에서 보였다. 이 항공기는 기수의 독특한 모양이 흰고래를 닮았다고 해서 ‘벨루가’라 불린다. 귀여운 별명과 달리 길이 63.1m·높이 19m·폭 60.3m의 몸집으로 최대 51톤(t)을 싣고 나른다. 유럽의 우주항공 제조사인 에어버스가 대형 부품을 운송하려고 만든 화물기이기 때문이다.

툴루즈는 인구로는 한국의 평택, 넓이론 수원만 하다. 기원이 로마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툴루즈는 ‘세계에서 가장 혁신적인 도시’로 꼽힌다. 벨루가는 오늘의 툴루즈를 보여주는 상징물이다. 지난 3일 만난 장-클로드 다르들 툴루즈 부시장은 “툴루즈는 유럽 우주항공 산업의 수도(Capital)”라고 강조했다.
그도 그럴 것이 에어버스의 본사 소재지가 툴루즈다. 탈레스·탈레스 알레니아 스페이스·사프란 등 다국적 우주항공 기업의 공장과 연구소, 사무실도 툴루즈에 있다. 프랑스의 국립 우주 연구 센터(CNES), 국립 항공우주연구소(ONERA), 고등항공우주학교(ISAE-SUPAERO), 국립 민간항공학교(ENAC) 등 우주항공의 연구·교육 기관도 들어섰다. 유럽 우주항공 산업 인력의 25%가 툴루즈에 있다. 유럽 최고의 툴루즈 우주박물관도 빠질 수 없다. 다르들 부시장의 자랑이 허투루 안 들린다.

이처럼 2000년 고도(古都) 툴루즈가 우주항공 도시로 탈바꿈한 배경엔 프랑스 정부의 지방분산 정책이 있다. 1968년 샤를 드 골 대통령은 ISAE-SUPAERO와 ENAC을 툴루즈로 옮겼고, CNES·ONERA의 연구소를 툴루즈에 세웠다. 지방 도시를 키워 파리로의 인구 집중을 막으려는 목적에서였다. 툴루즈는 우주항공 거점으로 선정됐다. 툴루즈는 제1차 세계대전 때 전투기 공장이 세워졌고, 이후 우편 항공사인 에어로포스테일이 아프리카·남미 노선을 취항했다.
다르들 부시장은 “당시 엔지니어들의 반발이 컸고, 정부는 ’1년만 살아봐라’고 달랬다”며 “1년 후 아무도 파리로 되돌아가지 않았다”고 소개했다. “기후가 좋고, 물가와 집값이 싸 파리보다 생활 여건이 훨씬 더 좋기 때문”이라는 게 다르들 부시장의 설명이다.

이 같은 연구·교육기관에서 배출한 풍부하고 우수한 인력은 틀루즈 우주항공 산업의 동력원이다. 툴루즈는 인구 50만명 중 12만명이 학생일 만큼 젊은 도시다. 프랑스의 교육 전문 매체인 르 에튀디앙이 꼽은 최고의 학생 도시가 툴루즈다.
ISAE-SUPAERO는 ‘그랑제콜’로 불리는 프랑스 고등 엘리트 교육기관 중 하나다. 지난 2일 에마누엘 제누 ISAE 대외협력실장은 “학생의 90%가 외국인”이라며 “전 세계에서 사업을 하는 툴루즈의 우주항공 업체는 다양한 국적의 인재를 채용하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ISAE에서 100m 거리에 ENAC이 자리 잡았다. ENAC은 조종사·관제사를 양성하는 국립 대학이다. ISAE-SUPAERO와 ENAC, 프랑스에서 둘째로 오래된 툴루즈대학 등 툴루즈의 교육기관은 박사 과정을 공유한다.

툴루즈의 성장은 외부와의 연대 덕분이기도 하다. 툴루즈는 2005년 보르도와 함께 ‘에어로스페이스 밸리(Aerospace Valley)’를 설립했다.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보르도엔 프랑스의 항공 방위산업체인 다쏘가 있다. 프랑스 남부 도시들이 우주항공 분야의 산·학·연 협력을 증진해 광역 클러스터(산업 집적지)로 크려고 힘을 합친 것이다. 에어로스페이스 밸리에서 800여 기업·기관의 14만명이 일하고 있다. 틸로 쇤펠트 에어로스페이스 밸리 국제협력담당관은 지난 2일 “에어로스페이스 밸리는 프랑스 우주항공 산업의 40%를 차지한다”며 “현재 이곳에서 R&D 프로젝트 920여 개가 진행 중이며 20억 6000만 유로(약 3조 3000억원)가 투자됐다”고 말했다.
에에로스페이스 밸리는 에어버스·다쏘·탈레스·사프란 등 대기업뿐만 아니라 스타트업에게도 열려있다. 또 프랑스만을 고집하지도 않는다. B612가 대표적이다. B612는 우주항공 스타트업이 성장하도록 돕는 인큐베이팅 공간이다. 이름은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의 소설『어린 왕자』에 나오는 소행성에서 땄다. 생텍쥐페리가 1920~30년대 비행기를 몰고 날던 공항을 우주항공 산업단지로 개발했고, B612가 그 한편에 자리 잡았다.

재사용이 가능한 우주캡슐을 개발 중인 독일 스타트업 익스플로레이션 컴퍼니는 B612에 입주해 있다. 이 회사의 앙투안 몽데제르 최고재무책임자(CFO)는 “본사는 독일에 있지만, 금융·공급망·네트워킹 때문에 툴루즈에 사무실을 냈다”고 말했다.

권홍우 한국우주항공산업협회 고문은 “클러스터는 지방 소멸 대책 차원이 아니라 국가 산업 정책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며 “한 곳에 몰아주기보다는 여러 곳이 연계해 발전하는 전략을 세워야만 성공할 수 있다는 게 오늘날 툴루즈의 교훈”이라고 말했다.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의 2025년 KPF 디플로마 우주항공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아 작성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