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이 미래다]〈151〉노 대통령 사상 첫 과학기술 간담회…“과학기술은 이 시대 번영을 이끄 가장 큰 힘”

2025-02-11

“과학기자 여러분, 21세기 고도산업사회와 첨단정보화사회가 우리 눈앞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시대 나라의 번영을 이끄는 가장 큰 힘은 과학기술입니다.”

1991년 4월 30일 오전 9시 30분 한국과학기자클럽(현 한국과학기자협회)은 서울 중구 태평로1가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실에서 노태우 대통령 초청 과학기술 간담회를 개최했다.

노 대통령은 이날 기조 연설을 시작하면서 “과학기술 자립 없이는 수출 증대도 경제 성장도 복지사회 구현도 이룩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대통령 초청 과학기술 간담회는 우리나라 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김진현 당시 과학기술처 장관의 증언. “대통령이 과학기자들과 만나는 것, 그것도 기자회견이 아니라 과학기자클럽 초청 간담회에서 과학기술에 국한해 기조연설을 하는 일은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이었다.”(대한민국 성찰의 기록)

이 일은 김진현 과학기술처 장관의 아이디어였다. 비과학자이자 언론인 출신인 김 장관은 과학기술을 상위정책 개념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과학의 달을 맞아 한국과학기자클럽과 노태우 대통령 초청 간담회를 추진했다. 당시 과학기자클럽 회장은 동아일보 이용수 과학부장이었다.

과학기술처 관계자의 말. “김진현 장관은 부임 후 언론인 출신답게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대통령과 과학기자의 만남이라는 이벤트를 마련했습니다. 언론인 출신이 아니면 생각지도 못할 아이디어였습니다.”

김 장관은 장진익 과학기술처 공보관에게 실무를 맡겼다. 그게 4월 초였다. 장진익 공보관은 청와대 공보수석과 한국과학기자클럽 이용수 회장 등과 여러차례 협의를 거쳐 행사 명칭을 '노태우 대통령 초청 과학기술간담회'로 결정했다. 간담회는 대통령의 기조연설, 과학기자와의 일문일답 방식으로 진행키로 합의했다. 내용도 과학기술로 한정했다. 대통령 기조연설 초고는 김 장관이 작성했다. 청와대 측 요청이었다.

과학기자클럽은 과학기술처 출입기자 및 각사 과학부 데스크 등과 수차례 토론을 거쳐 질문 문안을 작성하고, 질의 순서 및 질문자를 선정했다.

신종오 당시 중앙일보 과학부장의 회고. “질문자는 모두 10여명이었으며 과학기술 청사진, 정보통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출연기관 육성, 환경오염 대책 등으로 구성했다.”(과학기술 선진국을 이룬 숨겨진 이야기들)

순항하던 간담회는 장소 문제로 자칫 무산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청와대 측은 기자 회견장인 춘추관은 곤란하다고 했다. 다음 장소로 신라호텔을 제안했다. 경호실은 경호상 거리가 멀어서 어렵다고 했다. 다음 장소는 광화문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을 제안했다. 경호실은 거리는 가깝지만 헬기 착륙장과 20층까지 연결하는 고가사다리 차가 없고 행사장 뒤를 가릴 20폭 병풍이 없다며 난색을 표했다. 결국 여러 채널을 통해 경호실 측을 설득해서 최종 장소로 한국프레스센터를 결정했다. 20폭 대형 병풍은 신라호텔에서 빌려다 사용했다.

김진현 장관의 회고. “경호상 7층 이상 건물에서는 대통령 행사를 할 수 없다는 청와대와 광화문 프레스센터라는 언론 상징성으로 해서 한국프레스센터를 고집하는 과학기자클럽 간 승강이가 있었지만 청와대가 양보했다. 언론인 출신인 청와대 손주환 정무수석, 이수정 공보수석이 적극 지원해 주었다. 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한 것이 내겐 특별한 격려였다.”

참석 대상은 애초 부총리, 상공부 장관, 부사부 장관, 국회 정당 관계자 등이었다. 그러나 국무위원으로 김진현 과학기술처 장관, 이희일 동력자원부 장관, 송언종 체신부 장관과 대학 연구 관련 민간단체 및 기업대표 등 200여명만 참석했다.

노태우 대통령은 이날 15분 기조연설을 통해 “우리나라 과학기술이 2000년대까지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도록 미래를 설계하는 거대 기술과 공공복지 기술을 중점 개발하고, 과학기술 인재 양성과 과학기술 투자를 획기적으로 확대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 시대 나라의 번영을 이끄는 가장 큰 힘은 과학기술”이라면서 “정보통신산업기술, 신물질·신소재·생명공학, 항공·우주·해양기술, 환경기술, 원자력 자립기술 등에 과감히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과학기술 인재 양성을 위해 과학영재 교육 강화와 함께 서울대·연세대·고려대·부산대·경북대·전북대·한양대 등 우수 공대 정원을 내년부터 매년 도합 4000명씩 증원하고, 광주에 제2 과학기술대학을 신설하겠다”면서 “해외 과학 두뇌를 유치하기 위해 우리 과학기술자는 물론 외국인 과학자도 과감하게 유치하겠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과학 교육의 질적 향상을 위해 각급 학교 실험실습 시설을 대폭 개선하고, 과학기술인들이 긍지와 보람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지원하며, 훌륭한 연구개발 실적을 남긴 과학기술인에게는 연금을 지급해 은퇴 후 안정한 생활을 보장하도록 하겠다”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이어 1시간 20분 동안 과학기술 전반에 관해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했다.

-정보화 사회에 대비한 정보산업의 육성방안은 어떤 것인지요.

△“정보통신 기술은 선진국으로 가는 핵심 기술입니다. 1995년 무궁화위성을 띄워서 난시청 문제를 완전히 해소하는 한편 정보 전달 기술 개발로 영상회의, 고속 팩시밀리, 도서·벽지 통신 등 서비스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할 계획입니다. 1990년대 후반까지는 국가 기간 전산망을 깔아 국민생활의 모든 부분을 전국 동시정보 생활문화권으로 조성하겠습니다.”

-2000년까지 과학기술을 선진 7개국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습니까.

△“선진 7개국 수준은 국책 목표이며, 꼭 이뤄야 할 역사적 소명입니다. 미·일 등 선진 7개국처럼 몇몇 분야에서 세계 최고 기술력을 보유, 수출과 자체 노력만으로 기술 혁신을 추진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북한의 핵 개발에 대한 대응 방안과 원자력 안전성 확보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기본적으로 핵은 세계적인 문제입니다. 북한은 핵확산금지조약(NPT) 가입국이며, 따라서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핵안전 협정에 가입해서 국제적인 핵 사찰을 받는 것은 의무입니다. 우리는 핵 개발 위협을 제거토록 외교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과학기술을 통한 환경문제 해결 방안을 말씀해 주십시오.

△“더 이상의 환경오염을 막고 깨끗한 물,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할 것입니다. 첨단기술을 적극 개발해서 보급하고, 선진기술을 도입하며, 전문업체 육성 및 인력 양성 등 정책 추진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기초과학 육성과 생산기술 개발 우선순위에 대한 이견은 어떻게 조정할 계획입니까.

△“우리 경제는 경쟁력 강화를 위해 산업기술 수준을 높이는 일이 시급하지만 이를 이끌고 가는 기초과학 진흥도 함께 추진한다는 것이 기본정책 방향입니다.”

-정부출연연구기관에 대한 정밀진단 지시 배경과 과학기술인 연금지급제의 구체적인 계획을 말씀해 주십시오.

△“정밀평가 지시는 출연연구소의 실적이 부진하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고, 대학·기업연구소도 기반을 갖춰 이들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평가 결과에 따라 합리적인 개선 방안을 강구할 것입니다. 연금은 대학 출연연구기관, 국·공립연구소 연구원을 대상으로 세계적인 업적을 세운 사람에게 지급할 것입니다.”

-정부는 과학기술 투자 확대를 강조해 왔습니다.

△“기업이 감당하기 어려운 대규모 투자 등은 정부가 맡지만 산업기술은 기업 판단에 따라 기업이 개발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정부는 향후 5년 동안 생산기술 919개 과제를 개발하고, 이를 위해 1995년까지 1조5000억원을 조성해서 투입키로 했습니다. 2001년까지 과학기술 투자를 국민총생산(GNP) 대비 5%로 확대할 것입니다.”

이날 초청간담회가 끝난 뒤 경상현 한국전자통신연구소장은 자체 기술진이 개발한 세계 수준의 '고성능 반도체기억소자'를 처음 공개했다.

이날 간담회는 KBS가 전국에 중계방송했다. 국민 반응도 좋았다.

국정 최고 책임자인 대통령의 과학기술 의지와 구상을 확인할 수 있는 이 같은 과학기술 간담회는 아쉽게도 노태우 대통령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역대 정부에서 대통령 초청 과학기술 간담회는 두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이현덕 대기자 hdlee@et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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