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가 멀다 하고 지진 경보가 울리는 근미래의 일본엔 대지진의 우려를 틈타 극우 정권이 득세한다. 총리 키토는 “불법입국한 외국인과 반일 세력에 의한 흉악범죄가 대지진때마다 증가한다”고 주장하며 유사시 ‘안전’을 위한 내각 권한을 강화하는 헌법 개정을 추진한다.
소라 네오 감독(空音央·34)이 개봉을 앞둔 영화 <해피엔드>에서 상상한 미래 일본의 모습이다. 지난 24일 서울 종로구 한 카페에서 만난 소라 감독은 “지금은 법으로 금지된 ‘헤이트 스피치(공개적 차별·혐오 표현)’와 혐오 시위가 한창일 때 작품을 구상했다”며 “역사를 제대로 반성하지 않는다면, 미래에도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이러한 사회를 그려냈다고 말했다.
망가진 사회는 영화 속 소꿉친구 코우(히다카 유키토)와 유타(쿠리하라 하야토)의 오랜 우정에 균열을 낸다. 고등학교 음악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두 친구는 모범생보다는 문제아에 가깝다. ‘오늘은 또 무슨 장난을 칠까’만을 고민하는 듯한 유타에게 코우는 기꺼이 휩쓸려 왔다.
함께 말썽을 부려도 난처해지는 건 오직 코우다. 그는 재일한국인(자이니치) 4세다. 경찰에게 붙잡혀도 금세 훈방 조치되는 유타와 달리, 코우에겐 “특별 영주증명서를 보여달라”는 요구가 뒤따른다. 신경을 긁는 차이 때문일까. 코우는 일본인이면서도 ‘키토 총리·파시즘 반대 시위’에 나가는 동급생 후미(이노리 키라라)에게 눈길이 간다. 반대급부로 사회 문제에 관심이 없는 유타가 ‘아이 같다’는 생각이 싹튼다. 졸업을 앞두고 미묘하게 상해버린 마음은 둘의 우정을 어디로 데려갈까.

소라 감독의 첫 장편 극영화인 <해피엔드>는 정치적 견해 차이 때문에 친구와 서먹해졌던 감독의 실제 경험으로부터 시작됐다. 그는 미국에서 태어나 미국 뉴욕과 일본 도쿄를 오가며 성장했다. 2011년 일본 동일본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폭발사고 당시 소라 감독은 미국 코네티컷주 웨슬리언 대학교에 재학 중이었다. 먼발치에서 일본에서 벌어지는 반(反)원전 시위와, 그만큼 극렬했던 외국인에 대한 헤이트스피치를 지켜보며 그는 “정치적으로 눈을 떴다”고 한다.
미국의 2011년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 2014년 ‘흑인 생명은 소중하다(Black Lives Matter)’ 인종차별 철폐 운동, 2016년 ‘반(反)트럼프 시위’ 등 불평등과 차별에 반대하는 시민운동도 그에게 영향을 미쳤다. 20대의 소라 감독은 정치적 사안을 두고 친구들과 토론을 벌였고, 누군가와는 멀어졌다.
그는 “나의 기반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소중한 친구가 있었다”며 “정치적 지향이 달라지면서 서로 거리를 두고 대화조차 하지 않게 됐다. 슬펐고, 이는 영화를 만들게 된 계기”라고 했다. “말로 차마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던 감정”을 영화로 표현했다고 한다.
또 다른 모티브는 1923년 일본 관동대지진과 조선인 학살사건이다. 일본에서는 100여 년 주기로 큰 규모로 발생한다는 ‘난카이 해구 대지진’이 머지않았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소라 감독은 ‘그렇게 큰 지진이 발생할 때, 100년 전과 같은 학살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의문이었다고 한다. 그는 “지진이 나면 가와구치시의 쿠르드인들이 ‘나쁜 짓’을 한다는 가짜뉴스나 헛소문이 온라인상에 돌곤 한다”며 “그런 걸 보면 근원적인 원인이 사라지지 않고 있구나. 같은 일이 반복될 수 있겠다” 싶었다고 했다.
코우를 다른 국적이 아닌 ‘재일한국인’으로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소라 감독은 “차별이 어디서 오냐고 묻는다면 제도로부터 온다(고 대답할 것)”이라며 “재일 한국인은 몇 세대에 걸쳐 살고 있는데도 여전히 투표권이 없다. 그러한 차별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주제 의식은 무겁지만 <해피엔드>는 곧 성인이 될 청소년들의 찬란한 젊음, 복잡한 감정을 다룬 청춘영화다. 장난기 가득하면서도 일순 무심한 표정을 짓는 유타와, 진지하면서도 의외의 대담성을 보이는 코우는 캐릭터 자체로 매력적이다.
사운드 요소도 인상적이다. 유타와 코우가 사랑하는 테크노 음악의 강렬함과 밤중 불 꺼진 학교의 고요함이 대조되며 기묘한 분위기를 형성한다. 그 안에서 음악 동아리 부원들은 키득거리며 뛰논다. 느닷없이 시끄럽게 울리는 지진 경보음은 긴장감을 더한다.
세련된 사운드 디자인은 소라 감독이 2023년 작고한 일본의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어쩔 수 없이 상기시킨다. 그는 사카모토의 마지막 연주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류이치 사카모토: 오퍼스>(2023)를 연출했다.
‘차별의 당사자여도 행동하지 않는 사람과, 자기 일이 아닌데도 목소리를 내는 사람, 또 차별이 있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 다양한 인간 군상 속 나는 어디쯤 위치할까.’
<해피엔드>는 관객이 자신과 그를 둘러싼 사회를 돌아보게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폭력이 나와 내 친구의 일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나댄다’고 보일 수 있는 극중 후미와 같은 사람이 세상을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하는 장본인이라는 걸 느끼게 한다. 소라 감독의 표현을 빌리자면, “타인의 삶에 대한 상상력을 발휘할 줄 아는 사람”이 늘어나길 바라게 되는 영화다. 30일 개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