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리서 본 인생은 ‘바다’···가까이 가면 ‘사람’이더라

2024-10-28

카일리 매닝 한국 첫 개인전

히피 부모와 함께 해변을 유랑하며 자라

학비 위해 연어잡이 배에 올라

500t 선박 항해사 자격증도

파도 위 삶 작품에 녹여내

한 사람의 인생이 그림이 된다면.

서울 강서구 스페이스K에서 열리고 있는 카일리 매닝의 개인전 ‘황해(Yellow Sea)’를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매닝은 알래스카의 히피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바다가 끝없이 펼쳐진 해안을 따라 서핑하고 이동하는 유목민적 삶을 살았다. 바다와 그곳에 사는 사람, 매닝의 그림에서 이 둘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다. 솟구치고 가라앉는 물결 사이로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사람들 위로 물결이 덮친 듯도 하고, 파도가 사람으로 의인화된 것 같기도 하다. 반투명한 물결과 포말 사이로 얼굴과 몸의 윤곽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구상과 추상 사이 어디쯤이다. 변화하고 유동하는 삶을 그는 거침없는 붓질과 섬세한 색채로 그려냈다.

매닝에게 바다는 자라온 환경일 뿐 아니라 일터이기도 했다. 학비를 벌기 위해 연어잡이 배에서 일했다. 5명의 선원 중 유일한 여성이었다. 그는 500t급 선박 항해사 자격증을 갖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로프나 그물에 감겨 손이 잘리거나 다치는 사람들을 보고 뱃일을 그만둔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손만은 지켜야 했다. 매닝은 “물 위에서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바다는 저의 모든 작품에 연결돼 있다”고 말한다.

미국 뉴욕 브루클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매닝이 스페이스K에서 한국 첫 개인전을 열고 있다. 전시 제목은 ‘황해’다. 매닝은 한국 서해(황해)의 큰 조수 간만 차에 관심을 가졌다. 최대 9m에 이르는 조수 간만의 차이로 썰물과 밀물이 해변에 남긴 흔적이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방식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조수 간만과 마찬가지로 그림을 그릴 때 염료와 오일, 붓 자국들이 캔버스에 계속해서 증축되고 농축되면서 색채의 레이어를 만들어간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많은 기억과 이야기를 작품 속에 남기고 있다”고 말했다.

그의 그림은 멀리서 보면 강렬하게 휘몰아치는 파도와 같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희미한 사람의 윤곽이 보인다. 폭이 3.75m에 달하는 ‘격변’은 조수가 완전히 뒤바뀐 순간을 포착한 그림이다. 쨍한 푸른색부터 짙은 남색, 붉은색과 보라색 등 다채로운 색채의 자유로운 붓질 뒤로 얼굴이 흐려지고 윤곽만 겨우 보이는 사람부터 표정과 자세가 또렷한 사람까지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림 속 인물들은 중성적이다. 매닝은 “미술사에서 몸을 한 가지 방식으로만 본다고 생각했다. 여성 인물을 성적 대상으로 표현하는 게 피곤하고 재미없다고 느꼈다”며 “실제 사람들은 훨씬 더 다양하고 개방적이기 때문에 더 넓은 범위를 포괄하는 방식으로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했다.

매닝은 제주도와 해녀에 주목했다. 이번 전시에서 제주도의 돌 문화에 흥미를 느껴 제주 방언에서 따온 ‘머들’(돌무더기)을 선보였으며, 지난달 열린 프리즈 서울에서는 제주도 해녀 문화에서 영감을 얻은 ‘해녀’를 공개하기도 했다. 그는 “제주도에는 노후기에 접어든 해녀들로 구성된 모계 사회가 있다. 이런 특수한 모계 사회는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다”며 “어부로 활동하는 몇 안 되는 여성으로서 이런 풍경을 보는 것이 정말 즐거웠다”고 했다.

전시에서 볼 수 있는 20여점의 작품 가운데 하이라이트는 천장에서부터 베일처럼 드리운 7m 길이의 대형 회화 3점이다. 얇은 실크에 그려진 회화가 전시장 중앙에 드리워 관객들은 그 사이를 걸어다니고 스치고 통과할 수 있다. 매닝은 “눈을 감고 손을 펼쳐 실크의 속삭임을 느껴보면 좋겠다”며 “제가 자연에서 느꼈던 경험을 관객들과 공유하고 싶다”고 말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바다의 표정과 빛깔이 느껴지는 전시는 11월10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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