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인 자긍심 고취 프로젝트] 김종인 ㈜서일 회장
6·25 때 제주에 피난 와 구좌읍 세화리 정착
㈜서일 창립, 세계 빨대 시장 부동의 1위 지켜
2012년 국민훈장 동백장 등 각종 훈·포장 수상

김종인 ㈜서일 회장(88)은 황해도 개성 출신으로 6·25 전쟁 때 제주로 피난 와서 구좌읍 세화리에 정착하게 됐다. 세화중과 오현고를 졸업한 후 대학 진학을 하면서 상경했지만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대학을 중퇴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서울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으로 주택사업에 뛰어들었던 김 회장은 플라스틱 빨대 수출사업에 눈을 돌려 ㈜서일을 창립, 세계 최대의 친환경 빨대 기업으로 성장시킨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자수성가 후 제2의 고향 제주 발전을 위해 거금을 쾌척하는 등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제주로 피난 오다
김 회장(52)은 1937년 황해도 개성시에서 태어났다. 조상 대대로 인삼 농사를 크게 짓는 부유한 집이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모르고 컸다고 한다. 아버지는 경기도 경찰국 간부로 재직 중이었다.
6·25가 발생하자 경찰 간부였던 부친이 먼저 인천으로 피난을 갔고, 김 회장은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를 찾아 인천으로 갔다가 부친을 찾지 못한 채 부산으로 옮겼다.
부산에서 사실상 거지 신세를 면치 못했던 김 회장은 광복동 거리에서 우연히 부친과 조우하게 되면서 제주로 피난처를 옮기게 된 것이다. 김 회장은 “피난민을 실은 배가 성산포항에 입항했고, 당시 피난민 본부가 구좌읍 세화리에 있었기 때문에 세화에 거주하게 됐다”고 기억을 떠올렸다.
전쟁이 끝난 후 부친이 강화경찰서장으로 발령을 받게 되자 옷을 벗었고, 세화리에 서점 겸 문방구를 내면서 김 회장도 세화중 2학년으로 편입하게 됐다. 중학교 졸업 후에는 오현고로 진학, 제주북초 교사로 재직하고 있던 10살 위 형님에게 얹혀 살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대학 중퇴 후 생업에 뛰어들다
김 회장은 고교 졸업 후 성균관대 문리대 화학과에 진학했으나 등록금이 없어 1년 만에 중퇴했다.
김 회장은 대학을 중퇴하면서 서울 남산 팔각정에서 스스로에게 세 가지를 다짐했다고 했다.
“첫째는 반드시 성공해서 내 자리를 만들겠다, 둘째는 훗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 200명 정도에게는 혜택(장학금)을 주겠다. 셋째는 서울 한 귀퉁이라도 삶의 터전을 반드시 이뤄내겠다”는 것이었다.
대학 중퇴 후 군복무를 마친 김 회장은 서울 수유리 일대에서 부동산 중개업을 시작했다.
젊은 나이에 부지런히 일을 하다보니 주변에서 신뢰를 얻기 시작했고, 점차 돈도 모이자 주택사업에 뛰어들었다. 주택사업도 승승장구했다. 김 회장은 아파트로 사업을 확대키로 하고 부천 백운지구에 아파트 건설부지도 계약했다. 모든 일이 순조로운 듯 했다. 그런데 대기업이 끼어들었고, 토지주가 배상금을 주겠다며 부지를 팔지 않겠다고 나선 것이다. 당시 김 회장은 대기업 횡포로 인해 아파트 사업을 포기했다.

▲플라스틱 빨대 사업에 진출
김 회장이 아파트 건설에 실패했을 때 그의 눈길을 잡은 것은 정부의 강력한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었다.
정부의 정책에 부응해 수출시장을 개척해보자고 다짐한 것이다.
1979년 플라스틱 빨대 기업 서일을 창립한 것이다.
당시 해외 시장은 물론 국내 시장의 빨대는 일자형 빨대가 대세였다.
그런데 김 회장은 해외 현지에서 시장조사를 하며 일자형 빨대로 음료수를 흡입할 때 소비자들이 불편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착안, 구부러지는 ‘U자형 빨대“ 개발에 나선다.
3년 동안 연구·개발에 힘쓴 결과 U자형 빨대 제작 기술을 개발했고, 특허도 출원했다.
그런데 U자형 빨대의 비싼 가격이 문제였다. 하지만 김 회장의 설득으로 이탈리아의 유명 식음료 업체가 U자형 빨대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일자 빨대와 차별성이 확 드러나면서 소비자들로부터 큰 인기를 끈 것이다. 음료 업체들이 경쟁적으로 U자형 빨대를 주문하기 시작했고, 생산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해외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 1989년 인도네시아를 시작으로 중국과 미국, 튀르키예(터키) 등에 현지 공장을 건설, 현재 한국과 해외 5개국에 8개 공장을 운영 중이고 세계 130개국에 빨대를 공급하고 있다.
▲친환경 종이 빨대 제품 전환
몇 해 전부터 세계적으로 환경문제가 대두되면서 빨대 시장도 플라스틱 제품에서 종이 제품으로 급변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의 경우 2021년부터 빨대를 포함한 일회용 플라스틱 10개 품목의 사용을 전면 금지하고 있다.
김 회장도 이 같은 시장 변화를 예상하고 오래전부터 종이 빨대 개발 계획을 세우고, 막대한 투자를 통해 국내외 공장에서 종이 빨대 양산에 들어갔다.
그런데 생산 초기 종이 빨대가 플라스틱 빨대보다 가격이 훨씬 비싸 시장 수요가 부족했다.
김 회장은 “일회용 플라스틱 사용 금지 정책이 유럽에서 시작된 후 인도네시아에 공장을 크게 지었는데 각국 정부의 정책이 일관성이 없어서 종이 빨대로 인해 손해도 많이 봤다”고 털어놨다.
초창기에 종이 빨대가 플라스틱 빨대보다 가격은 비싸지만 품질은 떨어지고, 촉감도 좋지 않아 수요가 세계 시장에서의 수요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 세계 각국의 환경규제는 더욱 강화될 전망이어서 김 회장은 친환경 제품인 종이 빨대의 품질고급화를 통해 세계 시장 공략에 주력하고 있다.
특히 서일은 미국 식품의약국(TDA) 인증과 유럽의 ISEGA(식품접촉안전성) 인증 등 세계 각국의 안전인증을 받아 놓고 있어 친환경 빨대 분야에서도 세계를 선도하고 있다.
▲김 회장의 경영 철학
김 회장의 경영 철학은 ‘신용’이다. 한마디로 옛날 전국의 상권을 지배했던 개성상인(開城商人)들이 살아온 방식을 잘 알기 때문에 그 전통을 지키려 한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돈을 빌려서 못 갚으면 다시 돈을 못 꾸기 때문에 개성 사람들은 신용을 잃어버리면 못 산다”며 “그래서 남의 돈을 안쓰려고 한다”고 설명했다.
남의 돈을 빌리지 않으면 경기가 침체되고, 시장이 혼란스러워도 고통이 크지 않는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또 “선조들에게 누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회사를 경영해 왔다”고 덧붙였다.

▲오현고 총동문회관 건립 5억 쾌척
김종인 회장은 지난 2023년 오현고 총동창회에 총동창회관 부지 매입비 2억원을 기부한 데 이어 지금까지 회관 건립비 3억원 등 총 5억원을 쾌척했다.
김 회장은 “여유가 생기면 주변을 돌아보고 도와주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킨 것”이라며 거액을 쾌척한 배경을 설명했다. 그는 또 옛 오현고 총동창회관 건립 때도 1000만원을 기탁한 바 있다.
재경 오현고등학교 총동창회장(12~13대)을 연임하기도 했던 김 회장의 모교 사랑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1981년부터 가정형편이 어려운 오현고 재학생들을 대상으로 장학금을 지원해주고 있다.
처음에는 3명에게 매년 100만원씩 300만원을 지원하다가 10년전부터는 매해 200만원씩 600만원으로 장학금 액수를 늘렸다.
김 회장은 1978년 라디오 방송에서 등록금이 없어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하는 사연을 듣고 장학금 지원을 처음 시작한 후 1981년부터 모교인 오현고를 통해 후배들에게 장학금 혜택을 주고 있는 것이다.
▲제2고향 세화리 발전에 공헌
김 회장은 제2의 고향인 제주시 구좌읍 세화리 발전에도 앞장서 왔다.
김 회장은 1991년부터 세화리 복지회관 신축공사에 1000만원을 기탁한 것을 비롯 1996년 세화리 노인복지회관 공사에 1000만원을 기부하는 등 마을 발전을 위해 적지 않은 성금을 전달, 마을주민들이 그의 공덕비를 세워 고마움을 전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또 재경세화리향우회 활동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후원을 하기도 했다.
▲각종 훈·포장 수상
김 회장은 수출 시장을 개척하고, 다양한 사회 공헌 활동으로 각종 훈·포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1990년 EC국제대회 우수 경제인상(다나베 상)을 수상했고, 이듬해인 1991년에는 국무총리 표창장을 받았다. 이어 1996년 국민포장, 1998년 대통령 표창, 2012년에는 국민훈장 동백장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