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딸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나를 안아주며 “아빠… 죽지 마…”라고 했다.
퇴근 후 함께 TV를 보며 쉬고 있던 아빠가 황급하게 신문사로 돌아가야 한다며 집을 나서자 문까지 따라나와 한 말이다. 아이는 계엄령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모를 텐데 어디서 무얼 듣고 저렇게 말할까. 평소와 다른 아빠의 행동에서 뭔가 무서운 일이 벌어졌음을 직감한 모양이다. 계엄이 ‘통상적인 법·제도가 동결되고 시민들이 군대의 통제를 받는, 정부와 인민 사이의 전쟁상태로의 회귀’라는 개념 정도는 있었지만, 나 역시 이 나라에 계엄령이 마지막으로 내려졌던 때에 대한 감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사이 군대와 시민의 권력관계는 변했고, 누구나 한국은 더 이상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지 않는 사회가 되었다고 믿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회사 동료들과 계엄 관련 헌법 조항을 문자메시지로 주고받으면서도 여전히 믿기지 않았다. ‘아이돌봄 예산 불처리’가 계엄 선포 이유 중 하나로 동원된 것은 희극에 가까웠다. 지하철 옆자리 60대 남성이 휴대전화를 보다가 “이게 도대체 뭐고? 이거 완전히 미친 XX 아입니까?”라며 생면부지의 내게 말을 걸어오는 걸 보며 꿈은 아니구나 확신했다. “지금 원단·옷감 배달 다 마치고 퇴근했는데, 지금이라도 국회 앞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계엄이란 게 겪어본 사람들은 얼마나 무서운지 압니다. 국민들 먹고살기 어려운 거는 전혀 생각 안 하고, 대통령 맞나요?” 젊은이들도 ‘이게 뭔 일이지?’ 하는 표정으로 뉴스 속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한 40대 직장인은 “당장 주가와 환율이 걱정된다. 내 주식이 겨우 마이너스에서 회복되는가 했는데, 도대체 어쩌려고 저러나”라며 “다른 거 다 떠나서 경제적 이유 때문에라도 대통령의 행동에 화가 난다”고 말했다. 한밤중 대통령발 뉴스에 대다수 시민들이 비슷하게 느꼈던 모양이다.
회사에 도착하니 주식·환율 시장이 출렁였고, 한국은 전 세계 톱뉴스가 돼 있었다. 계엄사령관이라는 자의 1호 포고령으로 “일체의 정치활동을 금한다”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계엄법에 따라 처단한다”는 무시무시한 말들이 어지럽게 떠다녔다. 서울로 진입하는 장갑차, 국회 본관 유리창을 깨고 진입하는 군인들…. 영화 속 장면이 아니었다.
외국 지인들이 안부를 물어오기 시작했다. 미국 백악관은 “한국 정부와 다방면으로 접촉 중이고 상황을 면밀히 주시하고 있다” 했고, 국무부는 “중대한 우려”를 표하며 “평화적으로 해결될 것을 희망한다”고 논평했다. 미국의 이런 논평은 후진국에서 유혈 사태가 우려될 때 나오는 것이다. 앙골라를 방문 중인 미 대통령도 긴급 보고를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바이든이 가장 충실하다고 믿은 자유민주주의 동맹국 정상의 기습 행동에 충격을 받았으며, 한국 위기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골치가 아파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민주국가가 하룻밤에 독재국가로 전락한 순간이었다. 무엇보다 미국은 사전 통보를 받지 못했다고 했다. 주한미군 2만8000여명을 주둔시키고 전시작전통제권을 가진 미국은 한국군이 독자 행동한 걸 심각하게 받아들인다.
다행히 대통령의 계엄령 선포 2시간30여분 만에 여당 의원까지 참여해 국회의 계엄 해제 결의가 이뤄졌다. 계엄군과 시민 대치는 계속됐고, 대통령의 해제 결의 수용은 그로부터 3시간도 더 지난 뒤에야 나왔다. 미 국무부가 ‘한국 국회의 해제 결의가 준수되길 바란다’고 밝힌 직후였다. 미국 반응은 윤석열이 계엄 선포 후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외부 요인이었을 것이다.
동틀 무렵 잠든 딸의 곁에 무사히 돌아가 누웠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사태는 대통령이 국민 상대로 벌인 자해공갈로밖에 볼 수 없다. 각 정당 대표 체포조까지 투입한 걸로 보아 친위 쿠데타를 사전 모의하고 실행한 흔적은 있지만, 주도면밀하게 한 것 같지는 않다. 정부 내 진지한 논의 없이 대통령과 소수 참모가 즉흥적으로 결정했고, 내부 견제 장치는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통령실 이전, 의사 정원 증원, 한·일관계 등 이 정부의 중요한 결정이 대부분 그렇게 이뤄졌을 것으로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렇다면 이 나라가 2년 반 이 정도라도 형체가 유지되어온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까운 것 아닌가.
민주주의가 아무리 퇴행해도 군대가 시민에게 다시 총을 겨누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는 기본적인 믿음이 깨졌다. 많은 사람이 피 흘려 만든 민주주의를 한 사람의 충동적이고 비이성적 결정에 맡겨둘 수는 없게 됐다. 여야 정치권은 개헌을 포함해 민주주의 역진 방지를 위해 머리를 맞대야 한다. 그 전에 시급한 일은 무능한 데다 미치광이로 판명난 기관사에게서 열차의 운전대를 빼앗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