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승의 악귀, 풍요 수호신…기지개 켠 푸른뱀, 그 천의 얼굴

2025-01-26

저승세계에서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하는 열 명의 왕이 늘어선 가운데, 하단엔 그 중 변성대왕이 관장하는 지옥이 보인다. 서슬 퍼런 옥졸의 지휘에 따라 혀를 날름거리는 뱀들이 죄인을 잡아먹으려는 모습이다.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에서 열리는 기획전 ‘만사형통’(3월 3일까지)에서 만날 수 있는 불화 ‘저승 세계를 관장하는 10대 왕’(19세기)의 한 장면이다. 현세 생활에 충실하지 않으면 죽어서 ‘독사 지옥’을 겪게 된다는 메시지를 담았다.

전시장의 또 다른 벽면엔 7세기 중앙아시아 투루판 지역의 아스타나 고분에서 발견된 ‘복희와 여와 그림’(복제본)이 걸려 있다. 중국의 천지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두 신을 그렸다. 왼쪽의 여신 여와와 오른쪽 남신 복희의 하반신이 한쌍의 뱀처럼 나선형으로 꼬여 있다. 뱀의 교미 장면이 연상되면서 고대인들이 이를 통해 생명과 창조를 희구했음을 읽을 수 있다.

독기를 품은 혀, 미끈하고 축축한 껍질, 소리 없이 ‘스윽’ 꿈틀거리는 몸뚱이… ‘뱀’ 하면 일반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다. 서양 기독교 신앙에서 아담과 하와가 뱀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것처럼, 우리 인식에서도 뱀은 대체로 위협적이고 혐오스러운 동물이다. 그럼에도 열두가지 띠에 속할 정도로 수천년 역사를 함께 해온 ‘영물’이며 “뱀띠 해에 태어나면 머리가 좋다”는 속설도 전해진다. 위험·신비·재생·불사 등 상반된 이미지가 뱀을 둘러싸고 또아리 튼 모양새다. 뱀띠 해를 맞아 열리는 ‘만사형통’ 전시는 이 같은 다채로운 이미지를 민속 유물 55건(국내 36건, 국외 19건)을 빌어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 실물이 나오진 않았지만 뱀에 관한 가장 오래된 우리 유물로는 삼국시대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토우(土偶) 장식 토기들이 꼽힌다. 토우란 흙으로 만든 인형으로 선사·고대 시기에 사람·동물·사물을 본떠 만든 토제품. 가장 흔한 동물 증 하나가 뱀이다. 동물 민속에 관한 신간 『인간·동물 민속지』를 펴낸 천진기 박사(국가유산청 무형유산위원장)는 “무덤에 이 같은 부장품을 넣은 것은 죽은 사람이든 산 사람이든 풍요·다산과 불로장생이 소원이었기 때문”이라면서 “땅속에서 겨울을 보내고 봄에 다시 살아나는 뱀의 재생 능력은 고구려 벽화고분을 비롯해 다양한 고대 유물에 나타난다”고 말했다.

이랬던 뱀의 이미지는 통일신라 시대 십이지가 전래되면서 구체적인 방위 및 시간과 결합됐다. 뱀의 방위는 남남동쪽, 시간대는 전체 여섯 번째에 해당하는 오전 9시~11시다. 김유신묘나 진덕여왕릉묘 등 지배계층 무덤엔 열두 수호신상 중 하나로 사신(巳神)상이 들어섰다. 죽음과 삶의 경계에서 특별히 여겨진 뱀의 이미지는 점차 민간으로 퍼지며 다양한 세속 풍습과 만났다. ‘만사형통’ 전시를 기획한 민속박물관의 염희재 학예연구사는 “실생활의 뱀은 퇴치해야 할 흉물이지만, 두렵고 영험한 이미지는 무속신앙과 만나 업신(業神, 집안 곳간과 재물을 지키는 신)으로 숭배되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뱀이 가진 특별한 능력에 대한 경외는 다른 문화권에서도 확인된다. 예컨대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론의 아들이자 ‘의술의 신’인 아스클레피오스는 뱀이 둘둘 말린 지팡이를 들고 다닌다. 신화에 따르면 이 뱀은 의신의 하인이었는데 해마다 다시 소생해 탈피하며 새로운 정력을 불어넣는다고 한다. 뱀이 허물을 벗고 성장하는 데서 착안한 불사·재생의 이미지는 뱀 머리를 가진 괴물 메두사로 표현되기도 했다.

인간과 신을 잇는 신성한 존재로서의 이미지는 종종 샤먼(무당)과 결합됐다. 이번 전시엔 스리랑카의 마하 코라 가면 등이 선보인다. 스리랑카의 신하레스족이 질병을 쫓기 위해 사용한 18종류 역귀들의 얼굴 가면으로, 두 마리 뱀이 가면 전체를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땅꾼들이 뱀을 잡을 때 쓰던 도구와 제주도에서 뱀을 퇴치할 때 쓴 도구 ‘미심’ 등 이제는 거의 사라진 민속유물도 만날 수 있다. 염 학예사는 “우리 삶과 밀착해 이어져온 뱀을 한층 더 친근하게 느낄 수 있는 전시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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