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나를 돌아보는 시간 …‘사유하다’ 고요하게, 충만하게

2025-01-27

말없이 미소 머금은 반가사유상·나한상·석조보살상…석등과 대숲이 한눈에 담기는 깊숙한 서고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생각의 길로 나아가는 시간…비우고 내려놓고 의연하게, 더 나은 한 해를 다진다

매년 두 번의 기회가 주어진다. 목표를 세우고 무언가 이루겠다는 다짐을 할 기회가. 1월1일에 한 번, 설날에 또 한 번 새해를 맞는 덕분이다. 두 번의 기회가 있다는 사실은 많은 이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잠시 마음을 놓은 동안 올해 두 번째이자 마지막 기회인 설이 다가왔다. 더는 미룰 수 없다. 그러니 일단 떠나볼까. 차분히 나를 돌아보며 사색하기 좋은 곳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

사색의 공간이라면 여기가 빠질 수 없다. 이름부터 ‘사유(思惟)’라는 말이 들어가는 국립중앙박물관 ‘사유의 방’이다.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이 방의 주인은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이다. 사유의 방에 들어서기 위해선 어두운 복도를 지나야 한다. 1400여년의 세월을 이어주는 통로다.

방으로 들어서면 반가사유상이 보인다. 차분한 조명 아래 나란히 앉은 사유상은 생각보다 크지 않다. 그럼에도 넓은 방은 허전하지 않다. 사람들의 생각과 깨달음과 감동이 가득 들어차서일 터. 해맑게 뛰어오던 아이들은 직원이 손가락을 입에 대며 조심스레 내뱉은 ‘쉿’ 한마디에 조용해진다. 그런 방이다. 오직 고요함만 허용된다.

반가사유상은 왼쪽 무릎에 오른쪽 다리를 올리고 오른손을 얼굴에 살짝 댄 채 생각에 잠긴 모습이다. 반가(半跏)와 사유라는 이름은 그 자세에서 비롯되었다. 자연스레 손과 얼굴에 먼저 눈이 가지만 흥미로운 건 다리의 형태다. 가부좌 자세에서 한쪽 다리를 내린 형상이다.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시작하려는 것인지 혹은 끝내고 다리를 푸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래서 수행과 번민이 맞닿는 순간으로도 해석된단다.

각각 6세기, 7세기에서 온 그들은 지금껏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수행과 번민이 교차하는 끝에 어떤 깨달음을 얻었을까. 살포시 미소 띤 얼굴을 보니 긴 시간의 사유가 지루하진 않나 보다. 만족스러운 깨달음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그리 생각하니 조바심이 사라진다. 당장 무언가 이루어야 할 것만 같은 마음은 잠시 내려두고, 반가사유상을 마주한 채 눈을 감았다. 오직 자신만을 위한 사유가 시작되었다.

국립춘천박물관 ‘창령사 터 오백나한-나에게로 가는 길’

국립춘천박물관은 거대한 미디어아트로 유명하다. 아름다운 강원도의 산과 바다가 펼쳐지니 관람객들은 홀린 듯 앉아 그 화려함을 만끽한다. 시선을 사로잡으며 압도적인 에너지를 내뿜던 미디어아트는 한 장소에 도착한 순간 잔잔해진다. 화면에 등장한 건 숲속에 자리한 작은 석상들이다. 화면 아래 문구에 눈이 갔다. ‘창령사 터 오백나한’. 창령사는 과거 영월에 존재했던 사찰이다. 폐사한 지 300년이 지나 터만 남은 곳에서 발견된 건 500여개의 나한(羅漢), 그러니까 깨달음을 얻은 이들이었다.

2001년에 발굴된 오백나한은 2018년과 2019년 특별전을 통해 서울, 강릉, 부산 등에서 중생들을 만났다. 전국을 누비며 깨달음을 전한 셈. 그러다 2022년에 상설전시실 ‘창령사 터 오백나한-나에게로 가는 길’이 마련되었고, 나한들은 긴 여정 끝에 춘천에 정착했다.

전시실 여기저기 편히 앉은 나한상의 표정은 다채롭다. 기쁨과 슬픔, 즐거움과 분노가 담겼다. 생김새 또한 서로 다르다. 저마다의 표정을 지녔듯 각자의 얼굴을 가졌다. 아는 사람을 닮은 나한상이 하나 정도는 있을 것 같달까. 미묘하게 다른 그 표정들에서 나와 가족, 친구의 일상이 보인다.

나한의 사전적 의미는 이렇다. 생사를 이미 초월하여 배울 만한 법도가 없게 된 경지의 부처. 오백나한은 부처님이 열반한 후 그 말씀을 경전으로 만들기 위해 모인 500인의 제자를 뜻한다. 수많은 감정을 담은 나한들은 모두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였다.

그래서일까. 어느 얼굴에나 미소가 있다. 무슨 상황이든 또 무슨 감정이든 의연하게 받아들이는 이의 얼굴일 터. 그렇기에 이 공간은 위로와 성찰을 위한 곳이다. 한 해를 돌아보고 새해를 시작하는 데 이보다 더 좋은 시간이 있을까.

국립경주박물관 ‘신라천년서고’

국립경주박물관에도 사색을 즐기기 좋은 고즈넉한 공간이 있다. 커다란 창과 대나무숲 그리고 석탑이 상징적인 신라천년서고다. 본래 박물관 수장고로 사용되던 건물이 도서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신라천년서고는 꽤 구석에 자리하고 있다. 정문에서부터 종각을 지나 쭉 걷다보면 ‘고청지(古靑池)’라는 이름의 연못이 나오는데, 그 연못을 따라 깊이 들어가면 신라천년서고가 보인다. 2022년 12월에 개관한 신라천년서고는 2만여권의 도서를 소장한 신라 역사·문화 도서관이다. 국립경주박물관이 지금까지 발간한 모든 자료들을 볼 수 있어 학술적으로도 뜻깊은 장소라고 한다.

이 서고의 진짜 매력은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에 있다. 여느 도서관과는 달리 푹신한 의자들이 많다. 소장 도서가 적지 않지만 책을 빽빽하게 꽂지 않은 점도 인상적이다. 비움의 미학이 돋보이니 편안하게 의자에 폭 파묻혀 책을 읽기 좋다. 덕분에 이곳은 ‘눕독’ 명소가 되었다.

그럼에도 책이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예의상 한 권을 펼쳐봐도 눈동자는 딴짓을 하기 바쁘다. 어느 계절에나 커다란 창으로 들어오는 초록, 단정하게 정돈된 책장, 짜임새 있는 천장 때문이다. 눈알이 계속 도르르 굴러가느라 도무지 책을 읽을 틈이 없다. 그래도 괜찮다. 우리의 목적은 독서가 아니라 사색이기에.

창밖을 보며 ‘풀멍’을 즐겨도 좋고, 천년고도의 세월이 담긴 책장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다. 특히 눈이 가는 건 석등이다. 입구 맞은편에 선 석등은 진리를 밝히는 빛을 상징한다. 삶의 진리가 무엇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지만, 방문객들은 대개 석등 앞에서 한참의 시간을 보낸다. 참된 이치를 생각하고 고민하다 보면 희미한 빛이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석등과 대숲, 책장과 서까래의 조화가 안정감을 주는 사색의 공간이니 경주에 간다면 들러보길 추천한다.

월정사 ‘성보박물관’

평창 오대산에 자리한 월정사는 신라 선덕여왕 시절에 지어진 유서 깊은 사찰이다. 전나무 숲길로도 유명한데, 숲을 따라 걷다보면 성보박물관이 나온다. 월정사 성보박물관은 강원도 남부 지역 60여개 사찰의 국가유산을 보존하는 장소다. 국보 2건과 보물 5건을 포함한 56점의 국가지정문화유산과 82점의 시도지정문화유산 등 총 4000여점의 국가유산을 소장하고 있다.

볼거리가 많은 박물관이지만 역시 성보박물관의 주인공은 성보실이다. 삼척 영은사 괘불을 담아낸 거대한 미디어아트를 중심으로 여러 불상과 불화가 전시되어 있다. 셀 수 없는 부처의 눈이 지켜보고 있어서일까. 드러나지 않을 마음의 태도까지도 조심스럽다. 수행자가 된 기분이다.

성보실에는 석조공양보살실이라는 이름의 방이 있다. 국보 제48-2호인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을 위한 전시실이다. 높은 천장 아래 놓인 보살상은 오른쪽 무릎을 꿇고 왼쪽 무릎을 세운 모습이다. 월정사 경내에 있던 것을 옮겨왔는데, 월정사팔각구층석탑을 향해 공양을 올리듯 앉아 있었다. 지금은 모조품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석조보살상은 웃는 상이다. 공양을 올리는 일이 무척이나 기쁘다는 듯 만족스러워하는 표정이다. 가슴 앞으로 모은 두 손에는 원래 있었을 공양물은 사라지고 구멍만 남았다. 과연 무엇을 공양했을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덕분에 자유로이 상상하는 재미가 있다.

행복해 보이는 석조보살상의 모습에 생각이 많아진다. 자신을 혹은 타인을 위해 기꺼이 무언가 내놓은 게 언제였던가. 우선은 지금 이 순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루가 쌓이면 조금 더 나은 내일이 다가올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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