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더중플 - 6.3 대선주자 탐구
6.3 대선에 도전장을 내민 사람들. 나라를 맡겠다는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들이 언제 어떻게 정치 무대에 올랐는지, 정치를 하기 전에는 어떤 인생을 살았는지 기억하시나요? 세월이 바꾸는 건 강산만이 아닙니다. 노래 가사처럼 사람들은 모두 변하고 세상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습니다.
오늘의 추천!더중플은 ‘6.3 대선주자 탐구(https://www.joongang.co.kr/plus/series/282)’입니다. 그들의 사상과 전략, 공약, 지지 기반 같은 것에 천착하지 않습니다. 그저 그들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면서 탄생과 성장과 사랑과 투쟁의 이야기, 즉 땀냄새나는 삶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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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1
“야, 인마, 손 빼!”
순식간이었다. 육중한 프레스가 무서운 속도와 무게로 그의 손을 내리누를 듯 덮쳐왔다. 급히 정신을 차린 소년공 이재명(이하 경칭 생략)이 손을 빼는 순간 프레스기가 그의 왼쪽 손목 바깥쪽을 강하게 때렸다.
그가 15세 되던 해인 1978년 대양실업에서 벌어진 일이다. 소 등가죽을 프레스기로 재단해 야구 글러브, 스키 장갑 등을 만들던 그 회사는 그의 다섯 번째 직장이었다.
이재명은 프레스반 ‘시다’였다. 소가죽 원단을 이리 저리 들고 날랐다. 원단은 무거웠고, 보수는 노동강도에 비해 형편없이 적었다.

‘시다’의 꿈은 ‘프레스공’이었다. 그는 원단을 나르는 틈틈이 어깨너머로 프레스공의 작업을 훔쳐봤다. 쉬는 시간에 기계가 비면 몰래 가서 조작해보기도 했다. 프레스공이 돼야 월급도 올라가고 대우도 좋아질 수 있어서다.
소년공의 열망과 노력에 행운이 겹쳤다. 공장에 유압 프레스기가 들어오면서 기존 숙련공들이 모두 그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이재명은 졸지에 프레스공으로 승진해 구닥다리 기계식 프레스기 한 대를 맡게 됐다.
신이 나서 일하던 그에게 어느 날 바로 그 사고가 터졌다. 이재명은 프레스에 강타당한 손목을 부여잡은 채 고통스러워했지만, 병원에는 가지 않았다. 며칠 쉬면 나으려니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
7년 뒤인 1985년, 징병검사장에서 방사선 사진을 보던 군의관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재명은 그때 그가 내뱉은 한 마디를 평생 잊지 못한다.
장면2
“김문수 있소?”
“전데 누구십니까?”
“보안사에서 왔는데.”
뜨끔했다.
“군대에 가야 할 거 같네.”
더 뜨끔했다.
1971년 가을, 서울대에서 잘린 김문수(이하 경칭 생략)는 강제 징집 대상이었다.

대구 국군통합병원에 자진 출석한 그에게 보안사 요원이 어울리지 않는 ‘덕담’을 했다.
“너 몸 아픈 데 없지? 군대 잘 다녀와라.”
주저주저하던 김문수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저…. 사실 저한테 안 좋은 데가 있는데요….”
거대 양당의 두 대선 후보에게는 공통점이 많다. 둘 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보냈고, 노동자로 오랫동안 살았다. 그리고 군대에 가지 않았다. 면제 판정을 받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흙수저’임을 부인할 수 없었던 두 후보는 어떻게 해서 ‘금수저’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군 면제’ 판정을 받을 수 있었을까. 지금부터 그때 그 상황으로 돌아가 보자.
이재명의 굽은 팔, 군의관이 탄식했다
소년공 이재명이 프레스기에 부상한 그 순간은 실로 아슬아슬했다. 이재명은 훗날 다음과 같이 그때를 묘사했다.
최악의 상황을 모면했지만 그렇다고 손이 온전했을 리 없다. 손목은 순식간에 무섭게 부어올랐고, 팔이 몹시 아팠다. 그런데 왜 그는 곧바로 병원에 가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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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개판이네" 군의관 비명…이재명·김문수 군면제 사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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