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기록자’이자 ‘시대의 희생자’ 이응노

2025-08-25

1904년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홍천마을에서 태어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는데 아버지는 이를 반대했다지요. 그러자 아홉 살 때 그는 몰래 땅바닥이나 흙벽처럼 눈에 띄는 모든 곳에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다행히도 열일곱 살이 넘어선 아버지의 허락을 받았고 수묵화와 사군자의 기초를 배웠습니다. 그때만 해도 사람들도 잘 몰랐습니다. 앞으로 그의 화업이 ‘한국’이라는 울타리 안에만 머물지 않으리라는 것을. 고암(顧菴) 이응노(1904~1989) 얘기입니다.

최근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개막한 광복 80주년 전시 ‘향수(鄕愁), 고향을 그리다’를 보다가 고암의 작품 열세 점을 만났습니다. 특히 1940년대 중반에 그린 ‘홍성월산하’와 ‘수덕사일각’이 눈에 띄는데요, 신기할 정도로 화면에 담긴 나무들이 다 살아서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 가느다란 가지 끝까지 뻗쳐 있는 생명의 기운이 느껴질 정도입니다. 28세에 고암은 봄날 몰아치는 비바람에 술렁거리며 이리저리 쓰러지는 대밭의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뒤 “살아있는 대나무 그림을 그려야 한다고 느꼈다”는데, 이게 어떤 뜻이었는지 알 것 같습니다.

그리고 50년대에 그린 두 점의 ‘고향집’은 분방한 붓질로, 또 ‘덕숭산전경’은 부드러운 발묵으로 또 달라서 한 화가가 그렸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 밖에도 그는 ‘6·25 전쟁’(1950년대), ‘폐허의 서울’(1954년경), ‘조선호텔 뒤’(1952) 등을 그렸습니다. 전시를 기획한 김미금 학예연구사는 “고암은 누구보다도 시대를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를 고민한 작가였다”며 “공주산성, 고향집, 폐허 등 그의 모든 풍경화에서도 끊임없이 시대를 반영한 기법을 실험한 흔적을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응노 하면 보통 1970년대 문자 추상이나 80년대의 ‘군상’ 시리즈를 먼저 떠올립니다. 하지만 앞서 다양한 수묵화 기법으로 끊임없이 자기 혁신을 밀어붙였던 고암이 여기 있습니다.

50대 중반에 파리 화단에 뛰어드는 도전도 마다치 않았지만, 그는 ‘엄혹한 시대의 희생자’이기도 했습니다. 67년 ‘동백림사건’으로 2년 넘게 옥고를 치렀고, 77년엔 북한의 피아니스트 백건우 납치미수 사건의 연루자로 의심받으며 12년 동안 고국과 단절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리고 89년 1월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열리는 회고전을 앞두고 파리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20~1980년대 풍경화 210여 점을 볼 수 있습니다. 고암은 여기 소개되는 75인 중 한 명으로, 분단의 현실에서 조국이 제대로 품어주지 못한 천재 예술가의 사연을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지금 덕수궁에 가시면 한국 근현대 예술가들이 격동의 시대를 살며 남기고 ‘빛과 어둠의 땅’ ‘나의 고향’ 풍경화를 만날 수 있습니다. 11월 9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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