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정원] 단풍의 절규

2024-10-27

지난 주말 오랜만에 강원 정선에 다녀왔다. 서울을 떠나 해발 800m인 정선에 가까울수록 산들이 단풍으로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그런데 다가가서 보니 올해 단풍은 내가 알던 단풍이 아니었다. 단풍은 대개 노란색·갈색 그리고 붉은빛이 조화를 이루며 산을 덮는다. 겨울이 오기 전, 나무들이 마지막 아름다움을 뽐내는 것이 단풍이다. 나이가 들수록 봄꽃보다 서리와 맞서는 단풍이 좋아지는 까닭이다.

하지만 올해 단풍은 모두 칙칙한 누런색이었다. 바로 얼마 전까지 여름 같은 무더위가 지속돼 나뭇잎들이 가을을 준비할 여유가 없이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누렇게 시들어버린 것이다. 검은 잎들도 많이 있었다. 가을 숲의 절규가 느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올여름에는 ‘기상관측 117년 만에’라는 수식어가 붙는 폭염이 계속됐다. 심지어 올해 추석에는 기상관측 이후 처음으로 열대야가 나타날 정도였다. 9월 최고기온 신기록도 깼다. 추석이 아니라 ‘하석’이라는 말도 나왔다. 기상청은 이렇게 길어진 폭염 탓에 사계절의 기준을 바꾸는 작업에 착수했다.

폭염에 나무만 절규하는 게 아니다. 우리 밥상을 대표하는 김치를 만드는 배추도 위협받고 있다. 올해 농촌진흥청 국감 제출 자료를 보면, 고랭지배추 재배면적이 2050년에는 97%가 사라질 것으로 전망됐다. 2090년에는 재배면적의 99.7%가 없어진다. 신품종의 보급이 없다면 ‘배추김치’라는 단어가 사라질지도 모른다. 사과(99.4%), 인삼(94%)의 운명도 비슷하다(2090년 전망치).

동물은 어떨까? 올해 역대 최장 폭염에 수심이 깊어 다른 바다보다 차가운 동해안 양식 어류도 3분의 1가량 무더기 폐사했다. 지난 56년 동안 지구 표층 수온이 0.7℃ 오를 때 우리나라 바다는 1.44℃나 올랐다. 동해는 무려 1.9℃가 올랐다. 이렇게 뜨거워진 동해에 명태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고 오징어·고등어도 사라지고 있다.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올해 온열질환으로 응급실을 방문한 사람이 3704명으로 전년 대비 31.4%가 늘었다. 사망자는 34명으로 2018년 이후 두번째로 많았다. 미국 럿거스대학교 연구에 따르면 지구 지표면 평균온도가 1.5℃ 상승할 경우 건강에 악영향을 받는 인구는 약 5억800만명, 3℃ 상승할 때는 12억2000만명에 이른다. 폭염이 자살률도 높인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인류를 포함한 생태적 파멸을 몰고 올 수 있는 기후위기에 관한 뉴스는 끝이 없다. 그러나 일부 계층에서는 기후위기가 과장되거나 조작된 것이라고 말한다. 동물과 식물 그리고 인간이 겪고 있는 기후위기의 고통에 대한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는 의도다. 이런 말이 나오는 동안에도 노약자와 폭염과 혹한에도 일을 할 수밖에 없는 저소득층은 생명에 위협을 받고 있다. 사람들 역시 나무들처럼 소리 없이 절규하고 있다.

권은중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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