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 세상] 한강 소설의 고통과 고결한 결심의 순간

2024-11-28

한강의 소설을 모임에서 함께 읽기로 했다. 읽기 전부터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이미 읽은 사람들도 물론 익히 알고 있었다. 소설이 결코 만만하게 읽히지 않는다는 것을.

보통의 소설은 어느 사이에 몰입해서 할 일을 잊고, 밥 먹기를 잊고, 잠자기를 잊게 되는 것이 특징이다. 잠깐의 낯가림을 겪고 나면 마치 나의 오래된 친구인 양 마음이 맞닿기 때문에 얼른 할 일을 마치고 다시 이야기에 빠져들고 싶어진다. 그리고 가슴 두근거리는 경험으로 손톱을 깨물며 온몸이 책에 빠져든다. 그러나 한강의 소설은 만만치 않다. 소설과 시가 섞여 있는, 감수성과 상징이 풍부한 소설은 한발을 넣으면 진창에 빠지듯 공포에 빠진다. 눈앞은 흐릿해지고 시간은 뒤섞인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잘린 손가락의 신경을 되살리기 위해 3분에 한 번씩 신경에 바늘을 꽂는 장면이 나온다. 소설의 주제이다. 신경에 바늘을 꽂는 강렬한 통증은 잘려진 것(죽음)을 되살리기 위해 견뎌야 하는 고통이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통증은 매번 국가의 폭력을 잊을 건지 말 건지를 고민해야 하는 살아남은 자의 고통이다. 소설의 배경은 제주 4.3이지만 이태원 참사, 세월호 참사, 광주 학살 같은 국가 폭력을 떠오르게 한다. 죽은 시체의 얼굴에 쌓이는 하얀 눈을 손으로 닦아내며 가족의 시신을 찾아내는 참담함을 처연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같이 소설을 읽은 사람 중에 제주 4.3 유족이 있었다. 마을에서 한 날 제사가 많아서 우리 집 제사떡을 주면 그 집에서도 바로 제사떡을 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풍습인 줄 알았는데 나중에 알게 된 것은 한날한시에 총살당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4.3 유족회 가족은 이 소설이 실제보다 약하다고 했다.

나도 같은 것을 느꼈다. <소년이 온다>를 읽고 너무 약하게 표현한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도 학살에 대한 기록을 많이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칼로 도려내고 총으로 얼굴을 쏘고, 시민을 가장 잔인하게 죽인 군인에게 포상하는 국가, 시민을 보고 빨갱이 새끼라고 욕설하고 무차별 구타를 벌이는 군인의 무리, 옥상에서 시민을 향해 시민 수보다 많은 총알을 쏟아붓는 장면 같은 것들을 읽으면서도 그렇게 느꼈다.

그렇지만 소년이 시민군으로 남게 되는 고결한 결심을 드러내는 순간과 이름 없는 시신으로 구덩이에 던져지는 장면에서 모멸감을 느끼게 되는 영혼, 고문과 학살 가운데 살아남은 자들의 깨진 영혼에 대한 묘사는 아주 뛰어난 문장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여성 생존자에 대해 조심스럽게 다루어 준 작가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아프다고만 말할 수 없는, 인간이 갖게 되는 고결함에 대한 묘사는 인류가 만나야 하는 문학의 정신이었다.

한강의 소설을 시적 산문이라고 부르는 것은 소설의 주요 구성이 이야기뿐 아니라 시적인 상징과 비유가 빛나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대한 이미지, 나무로 상징되는 죽은 자들의 검은 형상, 앵무새의 눈을 씌워두면 잠을 자기 때문에 새장을 천으로 덮어두는 것, 시민군은 ‘사람을 죽이는 총을 쏠 수 없었다.’ 같은 것들은 시적인 이미지로 주제를 상징하는 것들이다. 소설을 읽고 있지만 마치 시를 읽고 있는 것처럼 짧은 문장 앞에서 긴 상상의 시간이 펼쳐졌다.

한강의 노벨문학상은 한글로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자긍심을 높여주었다. 섬세한 감수성뿐 아니라 국가 폭력을 당하는 자들이 느끼는 인간적인 모멸감을 품격 있는 시선으로 다루고 있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죽이고 그 가족들마저 고통에 빠트리는 비열한 태도를 새처럼 여린 감각으로 눈처럼 숭고하게 표현했다. 글을 쓰는 동안 작가가 많이 아팠을 거 같아서 미안해졌다. 그래도 번역 없이 만난 최초의 노벨문학상 작품 덕분에 정신과 미래가 풍요로워졌다.

조숙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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