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크리스마스를 앞둔 2018년 겨울, 불을 밝힌 강남의 한 재즈클럽에 휠체어를 탄 노(老)가수가 들어선다. 기다렸다는 듯 박수를 치며 반기는 사람들. 미소 띤 얼굴로 관객을 바라보던 노가수는 피아노와 콘트라베이스 반주에 맞춰 노래를 시작한다. 한국 재즈의 산실이라고 일컬어지는 ‘클럽 야누스’의 40주년 축하공연. 클럽의 안주인이자 반세기 가까이 야누스를 이끌어 온 재즈 가수 박성연의 마지막 라이브 공연이었다.
한국 재즈계의 대모(代母)로 불리는 1세대 재즈 보컬리스트 박성연의 이야기가 다큐멘터리로 관객을 만난다. 오는 22일 개봉을 앞둔 영화 <디바 야누스>(감독 조은성)는 재즈가 곧 인생이었던 박성연의 불꽃 같은 삶을 스크린에 되살렸다.
1943년 서울에서 태어난 박성연은 이화여고를 졸업한 후 미8군 무대 가수를 뽑는 오디션에 합격하며 재즈 인생의 첫걸음을 내디뎠다. 재즈가 뭔지도 모르던 시절, 박성연은 AFKN에서 흘러나오는 베니 굿맨, 글렌 밀러, 마리오 란자 등의 음악을 들으면서 자랐다. 오디션 무대에서 유명 재즈 스탠다드 곡 ‘Stardust’, ‘Cheek to Cheek’, ‘Just In Time’ 등을 불렀다. 영화는 “그땐 재즈를 알지도 못하고 어떻게 그런 곡을 불렀는지 모르겠다”고 당시를 회상하는 박성연의 모습을 비춘다.
점차 재즈의 매력에 빠져든 그는 음악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에 숙명여대 작곡과에 진학한다. 1970년대 초반 소공동의 뮤직 레스토랑과 호텔에서 색소폰 연주자 정성조 등과 합을 맞춰 공연 활동을 하고 동남아와 일본 등 해외 페스티벌 무대에도 서는 등 공연 활동과 병행하느라 학교를 졸업하기까지는 7년이 걸렸다.
그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 바로 ‘클럽 야누스’다. 박성연은 1978년 “눈치 보지 않고 마음껏 재즈를 부르고 싶다”는 바람으로 한국 최초의 토종 재즈 클럽 ‘클럽 야누스’를 연다. 1960~70년대 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성행했던 재즈는 나이트클럽이나 밤무대에선 반기지 않는 장르였고, 성인가요와 트로트가 인기를 끌며 음악 하던 사람들 사이에선 ‘재즈하면 굶어 죽는다’라는 말이 나돌 때였다. 딸이 술집을 여는 줄 알고 반대하던 그의 어머니는 “술집을 하면 지옥에 가서 화롯불을 머리에 이고 있게 될 것”이라며 만류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신촌역 앞 작은 화실을 개조해 만든 클럽 야누스는 곧 한국 재즈의 산실이자 연주자들의 사랑방이 된다. 생계를 위해 호텔과 캬바레 등에서 연주를 하던 이들이 매일 밤 야누스에 모여 즉흥 재즈 연주를 펼쳤다. 영화는 야누스에서 국내 1세대 재즈뮤지션들이 공연 장면을 담은 흑백 사진 등을 보여준다. 신관웅, 이판근, 김수열, 조상국, 이동기, 최선배 등의 젊은 시절 모습이 보인다. 박성연도 늘 무대 가운데에서 관객과 연주자 사이를 잇는 존재로 섰다.

야누스는 수많은 재즈 뮤지션의 탄생하고 성장한 한국 재즈의 성지이자, 그 음악처럼 자유와 해방, 공존의 공간이었다. 엄혹했던 시절, 야누스 앞을 지나던 이들은 문밖으로 흘러나오는 음악에 이끌려 재즈의 세계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나 그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관객이 점점 줄어들며 재정난이 악화했고 신촌에서 혜화동, 서초, 청담동으로 살림을 옮겨다녀야 했다. 박성연은 집을 팔고 평생 모은 음반 1500장을 처분하면서 야뉴스를 지켰다.
박성연의 오랜 후배인 재즈 뮤지션 말로는 언제나 단정하고 흐트러짐 없던 박성연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는 <디바 야누스> 언론시사회 뒤 기자들과 만나 “어느 유력 후원자가 공연 후 나에게 봉투를 건넨 적이 있는데 단칼에 거절하고 대기실로 와버렸다. 공연에 해가 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는데 선생님은 오히려 “잘했다”며 나를 칭찬하셨다. 선생님은 여성 재즈 보컬리스트로서 무대에 서고 클럽을 운영하면서 언제나 속된 욕망을 경계하고 강단 있는 삶을 태도를 보여주셨다. 후배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자랐다”라고 말했다.

대중음악과 재즈를 오가던 동시대 뮤지션들과 달리, 박성연은 평생 결혼하지 않고 한길을 걸으며 재즈에 헌신했다. 활동 기간에 비하면 음반 수는 많지 않지만, 그만큼 성숙하고 재즈의 정석을 보여주는 작품을 남겼다. 1985년 발표한 첫 번째 앨범 ‘박성연과 재즈 앳 야누스(Jazz At The Janus)’와 1998년 2집 ‘디 아더 사이드 오브 박성연(The Other Side Of Park Sung Yeon)’, 2013년 3집 ‘박성연 위드 스트링스(Park Sung Yeon with Strings)’까지 총 3장의 정규 앨범이 그것이다.

2015년 건강 악화로 야누스 운영을 후배들에게 맡긴 뒤에도 그는 노래를 놓지 않았다. 2016년에는 야누스 출신 피아니스트 임인건의 앨범 ‘야누스, 그 기억의 현재(Janus, The Reminiscence)’에 참여해 ‘별빛의 노래’, ‘바람이 부네요’, ‘길 없는 길’ 세 곡을 불렀다. 이후에도 휠체어를 타고 병원과 무대를 오가며 마지막까지 열정을 불태운 그는 2020년, 서울 은평구의 요양원에서 77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그가 끝끝내 지켜낸 클럽 야누스는 재즈 뮤지션 말로와 작사가 이주엽이 이어받아 지난 9월 광화문에 새롭게 문을 열었다. ‘바람이 부네요. 춥진 않은가요. 밤 깊어 문득 그대 얼굴이 떠올라….’ 삶의 무게와 깊이가 담긴 인생의 노래, 허스키하면서도 따뜻한 박성연의 목소리가 지금도 어딘가에서 울려 퍼지는 듯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