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윤석열 전 대통령은 지금 우리가 겪는 혼란의 근본 원인이 아니다. 윤석열에 앞서 윤석열을 대통령으로 만든 힘이 먼저 있었다. 그 힘은 여전히 건재하기에 다른 사람의 형상으로 다시 나타날 수 있고,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나는 사실 20대 대통령 윤석열의 모습에서 어디까지가 자연인 윤석열의 개성이고 어디까지가 그 힘의 본성인지 잘 구분하지 못하겠다. 갑작스러운 등장이나 전근대적인 세계관은 그 힘이 사람의 형태를 취할 때 반드시 따라붙는 요소인 듯하다.
힘이 아니라 질병이라고 부르는 게 나을까? 그렇다면 미국 공화당도, 한국 더불어민주당도 중증이다. 이 대목에서 오해 없기 바란다. 최근 3년간 국민의힘과 민주당은 결코 똑같은 정도로 잘못하지 않았다. 집권 세력이었던 국민의힘의 잘못이 훨씬 크다. ‘야당이 사사건건 발목을 잡았다’는 항변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거대 야당이 어떻게 등장했는지, 불과 1년 전 총선에서 왜 참패했는지 잘 생각해 보라. 계엄 이후에도 상당수 국민의힘 의원은 민주주의 가치를 수호하는 대신 자신들의 재선에 미칠 영향을 따져 움직였다.
그 힘이자 병을 한 단어로 말하라면 나는 ‘복수심’이라고 하겠다. 내가 보는 한국 정치는 이렇다. 태극기 세대와 젊은 남성들이 각각의 이유로 문재인과 민주당에 복수심을 품었고, 그 복수를 대리해 줄 사람으로 함께 윤석열을 밀었다. 윤석열은 그 일조차 잘하지 못했지만. 그런가 하면 이재명을 지금의 자리로 밀어올린 힘 역시 복수심이다. 이재명은 비주류연합이 내세운 복수자다. 복수심이 실체이며, 한국의 보수, 진보, 우파, 좌파라는 것은 많은 경우 그냥 간판이다.
내가 추구해 온 삶이 부정당하는 모욕감, 딱히 누리는 게 없는데도 수혜자이자 가해자로 몰리는 억울함과 고립감, 아무리 노력해도 나뿐 아니라 내 아이들조차 중산층이 될 수 없을 것 같다는 좌절감이 저절로 복수심이 되지는 않는다. 복수심에는 내러티브가 필요하다. 잘못한 것 없이 열심히 살아온 나를 이 지경에 빠뜨린 구체적인 적과, 그 적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에 대한 설명이 있어야 한다. 인간은 자신의 울분이 옳다고 말해주는 이야기라면 뭐든 믿을 수 있는 동물이라, 조잡한 스토리텔링에도 넘어간다. 그러다 보니 한국 사회와 자기 삶의 실패를 연결짓는 이야기에 친일파도 나오고 중국 간첩도 나오는 지경이다. 2020년대 많은 유권자는 그 서사의 결말로 정치권에 적과 그 가족의 구속을 요구한다. 기실 지금 한국 정치가 약속할 수 있는 비전도 그뿐이다. 공약집에 적힌 일자리 몇만 개 창출 같은 말은 이제 아무도 믿지 않고, 정당도 정성을 쏟지 않는다.
이 모욕감, 억울함, 고립감, 좌절감을 단시일에 해소할 방법은 없다. 현실 정치보다 훨씬 더 깊은 곳에서 벌어지는 문화전쟁은 이제 막 중반전에 들어섰다. 기술혁신과 금융자본주의는 계속해서 중산층을 무너뜨릴 전망이다. 유튜버로 대표되는 저질 스토리텔러들의 비즈니스와 거기에 올라타려는 정치꾼들 역시 당분간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면 뭘 하자는 거냐. 뭘 해야 하는지부터 제대로 논의해 보고 싶다. 우선 미래지향적 새로운 스토리텔링이 필요하다. 아무런 약속도 없는 상황에서도 사람은 자신의 이야기를 새로 쓸 수 있다. 과거의 나를 긍정하고, 현재의 고난에 정확한 의미를 부여하고, 과업과 거듭남의 길을 보여주는 미래가 나오는 이야기를 원한다. 영혼을 갉아먹는 파괴적 집념이 아니라 고난을 견뎌내는 희망의 힘을 새로운 이야기에서 얻고 싶다.
그러려면 탄핵과 대선 사이 째깍째깍 돌아가는 정치 시계에서 눈을 떼야 한다. 특히 이번 대선에 보수의 운명이 걸려 있다며 대결집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가장 경계해야 한다고 믿는다. 보수의 운명은 대결집이 아니라 대성찰에 걸려 있다.

◆장강명=소설가. 일간지 기자로 일하다 2011년 『표백』으로 한겨레문학상을 수상하며 등단. 대표작 『한국이 싫어서』 『댓글부대』 『우리의 소원은 전쟁』 등.
소설가 장강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