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교미를 마친 암컷 초파리가 보여주는 변화는 극적이다. 알을 낳기 시작하고, 더 이상 다른 수컷을 받아들이지 않으며, 식성까지 변한다. 이 모든 과정이 수컷이 넘겨준 정액 단백질에 의해 조종된다는 사실은 20세기 유전학의 쾌거였다. 그에 비해 수컷은 그저 유전자를 배달하고 사라지는 소모품이자, 수컷 초파리의 교미 후 변화는 기껏해야 잠시 지쳐 쉬는 ‘불응기’ 정도로 치부돼왔다.
하지만 최근 여러 연구는 겨우 두 달 남짓 살아가는 초파리 수컷조차 교미 후 복잡한 생리학적 변화를 겪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수컷에게 교미는 끝이 아니다. 그것은 거대한 변신의 시작이다. 교미라는 방아쇠가 당겨지는 순간, 수컷의 뇌와 몸은 생존과 다음 번식을 위해 완전히 재설계된다.
틴베르헌의 위계와 행동의 재편
동물행동학의 거두 니콜라스 틴베르헌은 동물의 행동이 위계적으로 조직돼 있다고 보았다. 배고픔, 성욕, 두려움 같은 본능이 서로 경쟁하며, 상황에 따라 하나의 행동이 선택되면 나머지는 억제된다는 것이다. 수컷 초파리에게 교미는 이 위계질서를 재편하는 결정적 사건이다.
교미 전 수컷의 최우선 순위는 짝짓기와 경쟁자 제거다. 뇌 속의 pC1 뉴런은 이 두 가지 욕망을 조율하는 사령탑이다. 그러나 교미에 성공하는 순간 상황은 반전된다. 수컷은 즉각적으로 구애를 멈추고 공격성을 억제한다. 흥미로운 것은 이 ‘평화 모드’가 단순한 현자 타임이 아니라는 점이다. 연구에 따르면 교미 후 수컷의 뇌에서는 억제 회로가 작동한다. 암컷의 페로몬을 감지하는 수용체가 활성화되면 GABA 뉴런이 공격성을 유발하는 신경망을 강제로 억제시킨다. 즉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 싸움을 멈추도록 뇌가 능동적으로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평화에는 조건이 붙는다. 바로 ‘배우자 방어 행동(mate guarding)’이다. 방금 짝짓기한 암컷 주변에 경쟁 수컷이 나타나면 억제됐던 공격성은 폭발적으로 되살아난다. 이는 자신의 유전자를 지키기 위한 고도로 계산된 문맥 의존적 행동이다. 평소에는 에너지를 아끼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모든 자원을 동원해 싸우는 것. 이것이 교미 후 수컷이 보여주는 행동 전략의 핵심이다.
왜 수컷은 교미 후 에너지를 아껴야 하는가? 답은 간단하다. 정액이 비싸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정자가 무한할 것이라 착각하지만 초파리 연구는 정반대의 사실을 보여준다. 이를 사정의 경제학이라 부른다.
정액의 핵심은 정자 자체가 아니라 정자의 이동과 수정을 돕고 암컷을 조종하는 정액 단백질이다. 이 단백질을 생산하는 데는 막대한 대사 비용이 든다. 최근의 연구에 따르면 하루에 5번 이상 교미한 수컷은 더 이상 자손을 낳지 못하는 상태에 빠진다. 정자는 남아 있을지 몰라도 이를 돕는 정액이 고갈됐기 때문이다.
이 고갈된 자원을 다시 채우는 데는 약 3일이 걸린다. 수컷 초파리가 교미 후 며칠 동안 구애를 멈추고, 잠을 더 자고, 먹이에 집중하는 이유는 바로 이 3일간 부속샘을 재건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본이 바닥난 사업가가 투자를 멈추고 내실을 다지는 것과 같다.
교미는 하지 못하고 암컷의 냄새만 맡는다면 어떨까? 뇌는 짝짓기가 임박했다고 착각하고, 몸의 자원을 번식 준비 태세로 전환한다. 하지만 보상, 즉 교미가 따르지 않는다면 이 투자는 고스란히 손실로 돌아온다. 이를 ‘인식의 비용’이라 한다.
최근 플레처(Pletcher) 그룹이 출판한 연구는 충격적이다. 암컷의 페로몬에 지속적으로 노출됐으나 짝짓기를 하지 못한 수컷은 수명이 급격히 줄어들고 지방이 감소하며 산화 스트레스에 취약해진다. 반면 카라조(Carazo) 그룹은 이를 ‘적응적 가소성’으로 해석한다. 짧은 시간의 노출은 번식 성공률을 높여주는 긍정적 장전 효과를 주지만, 그것이 장기화할 때만 비용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결국 짝짓기에 대한 기대감 자체가 생리적 비용을 발생시킨다는 점에는 이견이 없다. 뇌가 감각한 정보는 즉각적으로 대사 시스템을 바꾸고, 이것이 해소되지 않을 때 개체는 늙어간다. 우리는 이를 ‘노화의 페로몬 흔적’이라 부를 수 있다.
더 짧은 교미 시간…경험이 시간을 압축
최근 초파리 연구자들이 가장 주목하는 현상 중 하나는 ‘더 짧은 교미 시간(Shorter-Mating-Duration·SMD)’이다. 성적 경험이 없는 수컷은 교미 시간이 길다. 하지만 한 번이라도 성공적인 교미를 경험한 수컷은 두 번째부터 교미 시간을 20~30% 단축한다. 놀라운 건 시간을 줄여도 수정 성공률은 똑같다는 점이다. 이는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줄여 더 많은 암컷을 만나려는 수컷의 고도화된 전략이다.
이 현상은 어떻게 가능할까? 하얼빈공대의 우리 연구팀은 뇌 속의 ‘월하노인(Yuelao)’ 뉴런과 성적 경험 의존적 장기기억(SELTM)이 핵심임을 밝혀냈다. 첫 교미의 성공 경험은 뇌에 물리적인 기억(Engram)으로 저장된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이 과정에서 생체 리듬을 관장하는 시계 유전자 Clock과 Cycle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본래 24시간 주기를 맞추는 데 쓰이던 이 유전자들이, 교미 경험이 있는 수컷의 뇌에서는 ‘분’ 단위의 시간을 재는 ‘간격 타이밍(interval timing)’ 도구로 재활용된다. 이는 진화가 기존의 유전적 도구상자를 얼마나 효율적으로 써먹는지를 보여주는 결정적 증거다.
결론적으로 수컷 초파리의 교미는 단순한 생식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기억 흔적(Engram)’을 형성하는 과정이다. 이 흔적은 뇌의 시냅스 연결(neural engram)뿐만 아니라 대사 경로의 변화(metabolic engram), 호르몬 시스템의 재편(endocrine engram)을 모두 포괄하는 전신적인 기억이다.
최근 진행된 여러 연구는 수컷을 바라보는 패러다임을 바꿀 것을 제안한다. 수컷은 수동적인 유전자 운반체가 아니다. 수컷은 유한한 자원(SFP)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끊임없이 계산하고, 과거의 성공 경험(기억)을 바탕으로 미래의 행동 전략을 수정하며, 뇌와 몸을 실시간으로 연동시키는 복잡하고 능동적인 생명체다.
초파리라는 작은 미물이 보여주는 이 놀라운 생명 현상은, 행동이 어떻게 유전자를 바꾸고 다시 그 유전자가 어떻게 생리를 조절해 운명을 결정짓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정교한 모델이다. 우리는 이제 막 ‘수컷의 사생활’을 들여다보기 시작했을 뿐이다.
![[북스&]깜빡깜빡 나이 탓이 아니다](https://newsimg.sedaily.com/2025/11/28/2H0MQ42N92_1.jpg)
![[김홍표의 과학 한 귀퉁이]턱](https://img.khan.co.kr/news/r/600xX/2025/11/26/l_2025112701000749000089642.webp)




![[우리말 바루기] 맨날 이쁘다 이쁘다 하더니](https://img.joongang.co.kr/pubimg/share/ja-opengraph-img.png)
![[청소년기자] 감정도 데이터가 될 수 있을까](https://www.usjournal.kr/news/data/20251127/p1065622525351600_669_thum.jpg)
![[삼성화재배 AI와 함께하는 바둑 해설] 잔잔한 흐름](https://pds.joongang.co.kr/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511/28/e22a04e9-a785-4135-ab2d-0d076272546a.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