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방이 살린 ‘지포스’는 어떻게 ‘AI 시대 심장’이 됐나···젠슨 황과 GPU가 연 길

2025-11-12

2007년 프로그래밍 SW ‘쿠다’ 출시

2012년 ‘딥러닝’ 성장 가능성 본 뒤

쿠다 도구 개발 등에 투자 본격화

2020년대 ‘생성형 AI’ 등장 이후

자체 AI 생태계로 ‘독주 체제’ 구축

“‘지포스(GeForce)’와 PC 게임, PC방, e스포츠가 없었다면 오늘의 엔비디아도 없었다.”

지난달 31일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과 이른바 ‘깐부 회동’을 마친 뒤 서울 코엑스광장을 찾은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이같이 말했다. 엔비디아 그래픽카드 ‘지포스’의 한국 출시 25주년을 기념하는 행사 무대였다.

전 세계 시가총액 1위의 인공지능(AI) 반도체 기업 수장이 한국의 PC방 이야기를 꺼낸 데는 이유가 있다. 엔비디아는 본래 컴퓨터 그래픽 칩 회사로 출발했다. 게이머들의 성지인 PC방은 엔비디아 제품을 구매하는 고객이자 성장을 견인한 현장이었던 것이다.

한국은 엔비디아로부터 AI 개발·운영에 필요한 그래픽처리장치(Graphics Processing Unit·GPU) 26만장을 공급받기로 하면서 그래픽 칩으로 시작된 인연을 ‘AI 동맹’으로 확장했다.

12일 경향신문은 게임 그래픽을 빠르게 처리하기 위해 개발된 GPU가 어떻게 ‘AI 시대의 심장’이 됐는지, 엔비디아가 어떻게 자신만의 ‘AI 생태계’를 구축했는지 살펴봤다.

엔비디아 GPU의 역사는 1999년으로 거슬러 간다. 1993년 황 CEO가 2명의 동료 엔지니어와 의기투합해 엔비디아를 창업한 지 7년째였다. 회사는 앞선 제품의 실패로 파산 직전까지 몰렸다가 기술력을 토대로 다시 입지를 넓혀가고 있었다. 당시만 해도 그래픽카드는 컴퓨터의 ‘두뇌’인 중앙처리장치(CPU)의 연산 결과를 화면에 출력하는 게임용 보조 장치로 여겨졌다.

황 CEO 등 엔비디아 전현직 구성원 인터뷰를 기반으로 한 책 <엔비디아 레볼루션>에 따르면 황 CEO는 기술 사양만으로 칩이 팔리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실패를 거치며 마케팅의 중요성을 깨달은 터였다. 회사는 그래픽 성능을 크게 개선한 후속 제품에 ‘지포스 256’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CPU가 담당하던 3차원(D) 그래픽의 좌표 변환과 조명 효과 연산을 대신 수행하는 게 차별점이었다. CPU의 부담을 덜어주니 그래픽 연산 효율이 높아졌다. 이 제품을 통해 회사는 완전히 새로운 카테고리를 제시하고자 했다.

엔비디아 구성원들은 CPU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GPU’를 떠올렸다. 1999년 8월 황 CEO는 “세계 최초의 GPU”라며 지포스 256을 공개했다. 2년 뒤 엔비디아는 게임의 시각적 표현을 세밀하게 조정할 수 있도록 ‘셰이더 프로그래밍’을 지원하는 지포스 3을 내놓으며 기술적 우위를 굳혀나갔다.

GPU의 힘은 ‘병렬 연산’에서 나온다. CPU는 복잡한 작업을 순차적으로 처리하는 직렬 구조다. 만능 일꾼이지만 한 번에 여러가지 일을 처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반면 GPU는 단순하지만 많은 양의 작업을 동시에 처리하는 데 특화됐다. 이를테면 CPU는 레스토랑의 숙련된 주방장, GPU는 주방 보조들이다.

점차 연구자들은 그래픽과 무관한 연산 작업에서도 GPU를 함께 쓰면 CPU만 사용할 때보다 훨씬 효율적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문제는 엔비디아가 그래픽용으로 개발한 프로그래밍 언어를 써야 해서 어렵고 비효율적이라는 것이었다.

2007년 엔비디아는 그래픽 전문가가 아니어도 GPU의 연산 능력을 활용할 수 있도록 소프트웨어 플랫폼 ‘쿠다’를 출시했다. 개발자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C 언어만 알면 누구나 GPU 자원을 활용해 프로그래밍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도구다. 엔비디아는 자사의 모든 칩을 쿠다와 호환시키느라 막대한 비용을 들였지만, 초기에는 이용자가 드물고 투자자들의 시선도 곱지 않았다. 그럼에도 황 CEO는 쿠다가 ‘GPU 시대’를 이끌어 일반 컴퓨터가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를 풀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확신했다.

2012년 엔비디아가 AI에서 미래를 보게 된 결정적 사건이 일어났다. 그해 이미지 인식 기술을 겨루는 ‘이미지넷’ 경진대회가 세 번째로 열렸다. 대회는 1000개 항목에 속한 120만개의 이미지를 얼마나 정확하게 분류하느냐를 평가했다. 이전까진 이미지 인식률이 75%를 넘은 사례는 없었다.

하지만 캐나다 토론토대의 알렉스 크리제브스키 팀이 출품한 알렉스넷이라는 모델이 84.7%의 인식률로 우승했다. 알렉스넷은 두 장의 엔비디아 GPU와 쿠다를 활용해 딥러닝(인간 두뇌를 본딴 인공신경망을 통해 데이터를 학습·처리) 기술을 적용한 모델이었다. 알렉스넷의 우승은 딥러닝의 가능성을 알린 중대한 전환점이 됐다. 엔비디아도 엄청난 홍보 효과를 누렸다.

이후 엔비디아는 딥러닝에 투자하고 쿠다 도구 개발에 자원을 쏟았다. 선제적 대응 덕분에 2020년대 생성형 AI 열풍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열풍의 주역인 오픈AI도 엔비디아 GPU를 써서 챗GPT를 학습시켰다. GPU에 연산을 보조하는 고대역폭메모리(HBM)를 결합한 ‘AI 가속기(AI 연산을 빠르게 수행하기 위한 장치)’가 불티나게 팔렸다. 엔비디아는 AI 칩 시장에서 80~90% 점유율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 엔비디아는 스스로를 “AI 인프라 기업”이라고 규정한다.

쿠다는 GPU 대중화의 일등공신이었다. GPU를 쉽게 쓰게 해주는 쿠다는 엔비디아 제품 위에서만 작동한다. 쿠다 환경에 익숙해진 개발자들이 다른 칩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다. 엔비디아는 쿠다로 강력한 생태계를 구축해 개발자들을 묶어뒀다. 이는 애플이 iOS라는 스마트폰 운영체제로 아이폰 생태계를 꾸린 방식과 유사하다.

김두현 건국대 컴퓨터공학부 교수는 “장사는 GPU로 했지만 호주머니는 쿠다가 연 것”이라며 “AI 산업 발전을 쿠다가 이끌었다고 봐도 될 정도”라고 말했다.

다른 기술기업들이 엔비디아의 독주를 지켜보고만 있는 건 아니다. 오픈AI, 구글, 메타,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등은 엔비디아 의존도를 줄이기 위해 자체 칩을 개발·적용 중이다. 최근 오픈AI는 엔비디아 경쟁사 AMD와 대규모 GPU 공급 계약을 맺기도 했다.

김용석 가천대 반도체대학 석좌교수는 “엔비디아가 주도하는 구도가 크게 바뀌진 않을 것으로 본다”며 “아성이 무너질 정도는 아니고, 다른 기업들이 일부 시장에 진입하는 수준일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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