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시 남미의 맹주 브라질은 만만치 않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 원유 수입 중단을 거부한 인도와 함께 50%의 고율 관세를 때린 브라질에 화해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 지난 7월 쿠데타 모의, 무장 범죄단체 조직 등의 혐의로 기소된 ‘브라질의 트럼프’ 자이르 보우소나루 전 대통령 재판을 “마녀사냥”이라고 비난하면서 50% 고율 관세를 매긴 지 약 석 달 만이다.
트럼프가 브라질에 화해의 손을 내민 건 중국과의 무역 전쟁의 영향도 있었다. 중국은 미국산 대두 수입을 중단하면서 대신 브라질산 대두 수입을 대폭 늘렸다. ‘강대국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일정 거리를 둬야 한다’는 브라질 특유의 외교정책(autonomy from distance)이 서서히 빛을 발하는 흐름이다.
친미 전 대통령 기소에 50% 관세
룰라 “브라질에 대한 오만 안 돼”
중국, 브라질 대두 수입 대폭 늘려
전문가 “미국, 신뢰만 잃었다”

미국·브라질, “곧 정상회담 개최”
최근 마우루 비에이라 브라질 외교부 장관은 미국 워싱턴DC에서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과 만나 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의견 교환을 했다. 비에이라 장관은 “생산적인 분위기에서 협상 의제를 정리하기로 뜻을 모았다”며, 회담 개최 시기에 대해선 “조만간”이라고 밝혔다.
앞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브라질 대통령은 지난 6일 트럼프와 통화했다. 통화 직후 룰라 대통령은 “저는 80세가 됐고, 트럼프 대통령 역시 8개월 뒤 80세가 되니 8개월 더 늙은 제가 허물없이 호칭하면서 대화하자고 제안했다”고 소개했다. 미국의 고율 관세 부과에도 초연한 룰라의 여유가 묻어나는 대목이다. 룰라는 지난 18일 한 행사에선 “다른 나라의 어떤 지도자라도 감히 브라질에 대해 오만하게 말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며 “그것은 인간 존엄과 인성에 관한 문제”라고 연설하기도 했다.
브라질의 이런 ‘여유’는 경제적 요인과 국제정치적 요인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다. 우선 지난 15년간 브라질의 대미 무역 적자액은 4000억 헤알(약 99조원)을 훌쩍 넘겼다. 브라질은 현재 새로 제정된 경제 상호주의법에 따라 미국의 관세 부과에 대한 보복 절차에 돌입했는데 현실화될 경우 손해를 보는 쪽은 오히려 미국일 수 있다.
또 브라질의 대미 수출 의존도는 12% 수준(2024년 기준)이다. 멕시코(80%)와 비교하면 대미 의존도가 얼마나 낮은지 알 수 있다. “미국이 기침하면 멕시코는 폐렴에 걸리지만, 브라질은 가벼운 감기 정도만 앓는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미국이 커피, 설탕, 오렌지 주스, 철강 등 브라질의 주요 대미 수출 품목에 관세를 부과하면 소비자 가격 상승으로 이어져 미국 소비자를 직격할 수 있다.
국제정치적으로 2억1000만명의 인구 대국 브라질은 남미 대륙의 리더 역할을 해왔다. 현재 남미 경제공동체인 메르코수르(MERCOSUR)를 주도하고 있다. 동시에 브릭스(BRICS)의 창립 멤버이자, 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 국가와의 협력에 적극적이다.

중국, 9월 미국산 대두 수입 ‘0’
주목할 대목은 브라질과의 화해 흐름이 미·중 무역 전쟁의 와중에 중국이 희토류 수출 통제와 함께 미국산 대두 수입을 전면 중단한 뒤 나왔다는 점이다. 대두는 중국인의 소울 푸드인 돼지의 사료로 사용된다. 미국 농무부에 따르면 세계 최대 수입국인 중국은 지난해 미국산 대두 생산량의 3분의 1가량을 구매했고, 수입액은 126억 달러(약 17조8000억원)였다.
중국 해관총서 발표에 따르면 올해 들어 미국산 대두 수입을 서서히 줄여온 중국은 지난달 아예 수입을 중단했다. 중국 판로가 막히자 가을 수확철을 맞아 지난해 부셸(약 21.21㎏)당 13달러였던 대두 가격은 최근 10달러 선까지 폭락했다. 대신 중국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국가로 수입국을 대체했다. 중국 관영 글로벌타임스는 중국이 올해 브라질산 대두의 79% 이상을 수입하고 있다고 브라질 곡물수출협회를 인용해 보도했다. 해관총서에 따르면 중국의 대두 수입에서 브라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6년 14%에서 지난해 22%로 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다급한 건 트럼프였다. 내년 중간선거의 최대 승부처인 스윙 스테이트의 농심(農心)이 흔들리자 트럼프는 전 세계를 상대로 대두 세일즈에 나서고 있다. 위성락 국가안보실장은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농산물과 관련해 (미국으로부터) 유일하게 들은 건 대두”라고 언급, 미국의 대두 구매 요청이 있었음을 시사했다.
대두 농가 피해에 공화당 중간선거 비상
트럼프는 지난 1일 SNS에 “4주 후 시진핑 주석과 만날 것이며 대두는 주요 의제 중 하나”라며 “대두와 다른 작물을 다시 위대하게”라고 적기도 했다. 반면 미국 민주당은 트럼프의 관세 전쟁이 대두 농가에 피해를 준다는 광고를 제작해 아이오와, 미주리, 오하이오, 위스콘신 주 등에서 방영할 예정이다.
이런 와중에 트럼프 행정부는 ‘남미의 트럼프’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의 아르헨티나에 통화 스와프 200억 달러를 포함, 총 400억 달러의 구제금융을 제공키로 했는데, 정작 아르헨티나가 중국에 대두 700만t을 수출하면서 미국 농가의 분노를 사고 있다. 척 그래슬리 공화당 상원의원(아이오와)은 “왜 미국이 아르헨티나를 구제하면서 미국 대두 생산자들의 최대 시장을 빼앗도록 놔두나”라고 비판했다.
후세인 칼루트 브라질 국제관계센터 자문위원은 최근 포린 어페어스 기고문에서 “트럼프의 보복 고율 관세가 룰라에 대한 불신과 정권 교체를 촉진하기 위한 것으로 비치면서 워싱턴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며 “이로 인해 브라질을 중심으로 남미 국가들이 모이는(rally around the flag) 효과를 내고 있으며 브라질에 대한 중국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