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업 호황 당분간 이어지겠지만…중국 추격은 여전히 부담
10여년 전 '해양플랜트 무리수'로 몰락 위기 몰렸던 전철 밟지 말아야
산업계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혹은 필연적으로 등장한 이슈의 전후사정을 살펴봅니다. 특정 산업 분야의 직‧간접적 이해관계자나 소액주주, 혹은 산업에 관심이 많은 일반 독자들을 위해 데일리안 산업부 기자들이 대신 공부해 쉽게 풀어드립니다.
#포지티브적 해석 : 벙커C유 때면서 매연 뿜는 배 10만척, 2050년까지 퇴출…"수요는 충분하다"
#네거티브적 해석 : 무지막지한 수요만큼 중국이 조선소를 무지막지하게 짓는다면?
요즘 조선업계에서 ‘중국의 추격’이 종종 회자되고 있습니다. 중국이 전세계 선박 수주를 싹쓸이하고 있다느니, 한국의 수주 점유율이 중국에 크게 밀린다느니 하는 비관적인 얘기가 나옵니다.
올해 11월까지 전세계 누적 수주량 6033만CGT(표준화물선환산톤수) 중 중국이 69%에 해당하는 4177만CGT를 가져갔는데, 한국은 1092만CGT를 수주해 18%를 점유하는 데 그쳤으니 수치만 보면 우리가 중국에 밀리는 건 사실이긴 합니다.
다만, 수주 척수를 보면 지금이 무작정 일감만 쌓아두는 게 현명한 상황은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11개월간 중국은 1518척을 수주했습니다. 같은 기간 한국은 248척을 수주했습니다.
척수로 치면 중국에 더 밀립니다. 한국과 중국의 수주 비율은 CGT 기준 3.8대 1인데 척수 기준으로는 6.1대 1입니다.
이게 뭘 의미하냐면, 한국의 척당 CGT가 중국보다 월등히 높다는 겁니다. CGT는 선종별 작업 난이도를 반영한 표준화물선환산톤수입니다. 건조 난이도가 높으면 가격도 비싼 건 당연하겠죠. 즉, 무식하게 무게나 부피만 나타내는 게 아니라 배의 부가가치도 반영하는 수치란 겁니다.
한국은 척당 4만4032CGT, 중국은 척당 2만7516CGT로 계산되니, 한국이 월등히 비싼 배만 선별적으로 수주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현재 3년치를 상회하는 일감을 쌓아둔 상황에서 발주가 나온다고 닥치는 대로 수주할 게 아니라 비싼 것만 골라 수주한다는 얘깁니다. 당장 수주 점유율이 중국에 밀린다고 걱정할 일은 아니란 말이죠.
HD한국조선해양과 한화오션, 삼성중공업 등 국내 대형 조선 3사는 이런 식의 선별수주를 계속 해오면서 올해 첫 동반흑자가 확실시되는 등 손익구조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고로 조선업은 배를 만들어 놓고 파는 게 아니라 수주에서 건조기간을 거쳐 최종 인도까지 2년 이상, 요즘처럼 도크가 만석일 때는 3년까지 소요되는 만큼 수주실적이 바로 현금화 되는 건 아닙니다.
선박을 발주한 선주는 수주계약, 강재절단(착공), 용골거치(탑재), 진수, 인도 등 각 단계마다 찔끔찔끔 나눠서 비용을 지불합니다. 조선 업황이 안 좋아 도크가 텅텅 빌 때는 선주가 슈퍼갑(甲)이 되기 때문에 지불 비중을 뒤쪽으로 몰아 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이걸 ‘헤비테일’이라고 합니다.
2020년 이전 불황기 때는 선박 가격이 낮았을 뿐 아니라 그나마도 인도 시점에 지급하는 대금 비중이 80~90%에 달해 조선소들의 어려움이 컸죠. 하지만, 요즘은 계약, 강재절단, 용골거치, 진수 등 단계에서 10%씩 지급하고 인도대금을 50%정도로 낮추는 방식으로 계약하는 사례도 있다고 합니다.
조선 업황이 2021년부터 본격적으로 살아나기 시작했음에도 국내 조선업체들이 올해 들어서야 제대로 돈을 벌기 시작한 건 이런 계약 구조 때문입니다. 2021년부터 높은 선가에 좋은 조건으로 수주한 선박의 인도대금을 이제야 손에 쥐는 겁니다.
이렇게 긍정적인 업황에도 불구하고 계속 중국발 위기론이 나오는 건 원자재와 인건비 비중이 높은 중후장대(重厚長大) 산업이 중국에 먹히기 딱 좋은 구조고, 조선업 역시 이에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조선업의 중국발 위기론이 불거진 건 최근의 일이 아닙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한국 조선업은 중국을 두려워했고, 지나친 두려움이 무리수로 이어져 스스로 몰락 위기까지 초래하기도 했습니다.
2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보겠습니다. 2000년대 초중반은 조선산업 사상 최대의 호황기로 불립니다. 이 시기에 많은 발주가 이뤄졌고, 물론 지금처럼 많지는 않았지만 공급능력에 한계가 있었기에 조선소들은 돈을 쓸어 모았습니다.
당시부터 세계 조선산업을 주도하던 국내 대형 조선 3사도 당연히 황금기를 누립니다. ‘거제나 울산에서는 개도 만원 짜리를 물고 다닌다’는 얘기가 나온 것도 이 때입니다.
그러면서도 뭔가 찜찜했죠. 바로 ‘세계의 공장’을 자처하며 무섭게 치고 올라오던 중국의 존재입니다. 조선 산업은 반도체나 자동차에 비해 기술적 진입 장벽이 낮은 것으로 여겨졌기에 한국 조선업계의 불안감은 더 컸습니다.
지금처럼 ‘굴기’ 타령 하며 설레발치지 않고도 중국은 그 넓은 땅덩이를 둘러싼 길고 긴 해안 곳곳에 조선소들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당시 중국 조선소들의 기술력은 초보 수준이었습니다. 텅 빈 화물창을 지닌 벌크선, 이른바 ‘깡통 배’가 중국 조선소의 주력이었습니다.
반면, 국내 조선소들은 7000TEU(1TEU는 20피트 컨테이너 1개)급 컨테이너선은 물론, 30만DWT(재화중량톤수)급 VLCC(Very Large Crude Carrier)까지 지을 수 있었죠. 지금은 2만TEU급 정도는 돼야 크다는 소릴 듣지만 당시엔 7000TEU급만 해도 ‘매우 큰 컨테이너선’이라는 의미의 VLCS(Very Large Container Ship)라는 명칭이 붙었습니다.
그럼에도 한국 조선업계의 불안감은 컸습니다. “잘 나갈 때일수록 추락에 대비해야 한다”, “일반 상선으로는 중국과 경쟁이 안되는 시기가 곧 온다”는 공포와 함께, 초호와 크루즈선, 초대형 해양플랜트 등 단번에 조단위 수주액을 끌어올 수 있는 것들로 도크를 채워야 한다는 지적이 잇따랐습니다.
결국 국내 조선 3사는 ‘독이 든 성배’에 손을 댔습니다. 글로벌 오일메이저들이 해양 유전개발 사업에 나서면서 한국 조선소들에 해양플랜트 발주를 타진했고, 국내 조선소들은 좋다고 받아들었습니다.
그때는 전체 수주금액 중 해양플랜트 비중이 곧 ‘미래가 유망한 조선업체’의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해양플랜트 한 기 가격이 웬만한 상선 십여 척보다 높다 보니, 총 수주금액의 절반 이상을 해양플랜트로 채운 곳도 있었죠.
이 과정에서 큰 실수를 저지릅니다. 수주 경쟁이 격화(그것도 국내 업체들끼리)되다 보니 리스크에 대한 대비가 철저하지 못했던 겁니다. 원래 초행길에는 돌 다리도 두들겨 가며 건너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과거 만들어진 전례가 없는 해양플랜트들을 건조하면서 너무 큰 위험 부담을 떠안은 것이죠. 국내 조선소들은 주로 하부 구조물을 담당하고 고부가가치인 상부 구조물은 외부에서 사다 설치하는 방식도 문제가 됐습니다.
그리고 몇 년 지나지 않아 그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함께 국제유가는 폭락하고, 오일메이저들은 굳이 큰돈을 투자해 바다 밑 유전을 개발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됩니다.
유전 개발이 시급했었을 때 발주한 해양플랜트는 한국 조선소에서 한창 건조 중이었고, 비용도 극히 일부만 지불한 상태였죠.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해양플랜트를 발주했던 일부 석유개발회사는 유가 폭락으로 존폐 위기에 내몰리면서 대금 지급 여력을 잃게 됩니다. 그럭 저럭 상황을 버틸만 했던 오일메이저들도 계약을 뒤집기 위해 머리를 굴립니다.
전례가 없던 해양플랜트 건조였던 만큼 시비를 걸기도 좋습니다. 이리저리 설계 변경을 요구하고, 을(乙)의 위치인 한국 조선업체들은 그걸 들어주다 보니 공기(工期)가 늦어집니다. 그래 놓고 납기를 지키지 못한 것을 빌미로 막대한 위약금을 제한 헐값에 해양플랜트를 인수하거나, 심지어 계약을 파기하는 파렴치한 짓을 오일메이저란 이들이 저지릅니다.
그나마 사업의 다른 한 축이었던 상선 부문도 글로벌 금융위기를 기점으로 어려워집니다. 2000년대 중반, 조선 호황의 절정기에 발주됐던 선박이 이 때 쏟아져 나왔거든요. 세계 경제가 위축되고 물동량도 감소하는 와중에 선복(화물을 싣는 선박의 공간) 공급이 급격히 늘어나니 운임 폭락은 불가피한 일이었습니다. 선박을 발주할 해운업체들이 잇달아 파산하는 판국에 조선업체라고 무사할 리 없습니다.
상선과 해양플랜트 모두 박살이 났으니 실적은 안 봐도 뻔하겠죠? 조선업체들의 적자 행진은 계속되고, 2010년대 중반에는 누적되는 적자를 견디다 못해 ‘한계산업’ 딱지가 붙습니다.
결국 정부가 구조조정에 나서고, 대형 조선 3사는 도합 10조원 규모의 자구계획을 내는 한편, 정부로부터 펀드와 현물출자 등 도합 12조원의 자금을 수혈받으며 가까스로 생존하는 상황까지 몰립니다.
특히 3사 중 대우조선해양의 부실이 가장 심각하게 드러나면서, 본의 아니게 대주주로 이 회사를 끌어안고 있던 KDB산업은행은 그나마 가격이 좋을 때였던 2008년 팔아치우지 않은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게 됩니다. 이후 대우조선은 역대 산업은행 회장들의 ‘고혈압의 원흉’이 되죠.
2008년 대우조선 매각 추진 당시 우선협상대상자는 한화였습니다. 그때 한화는 무려 6조원대 인수금액을 제시했다가, 자금조달 문제로 분할 납부를 요청했는데, 산은이 거절하며 매각 절차가 중단됐었습니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2023년 한화는 단 2조원의 금액으로 대우조선을 인수해 지금의 한화오션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2016년 구조조정 논의가 한창이었을 때는 대형 조선 3사의 건조능력 30%를 구조조정하자는 방안까지 나옵니다. 실제 도크가 폐쇄되는 상황까지 가진 않았지만, 그런 검토가 이뤄질 만큼 분위기는 험악했습니다.
이후로도 조선 업황은 크게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다가 2020년 코로나19 팬데믹을 맞습니다. 다들 세계 경제에 먹구름이 끼었다고 생각했지만, 2021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집니다. 오랜 기간 집에 갇혀 억눌려 있던 사람들이 한꺼번에 돈을 쓰며 분풀이를 하는 ‘보복소비’ 현상이 나타난 것이죠.
순식간에 글로벌 물동량이 늘어나고, 해운업체들은 배가 부족해 못 실을 정도로 수없이 몰려드는 화물 러시에 ‘즐거운 비명’을 지릅니다. 당연히 조선소에 주문서가 날아들겠죠. 그렇게 조선 업황이 살아나며 수주한 배들이 지금 국내 조선업체들의 호실적의 바탕이 됐습니다.
가까스로 불황에서 벗어난 한국 조선업계가 그 사이 폭풍성장한 중국 조선업체들을 경계하는 건 필연적입니다. 지금의 중국 조선소들은 초대형 컨테이너선이나 초대형 유조선은 물론, 고부가가치 선박인 LNG(액화천연가스) 운반선까지 만듭니다.
성숙 산업을 한 나라만 영원히 해먹을 수 없다는 건 이미 역사적 사실을 통해 증명됐습니다. 조선 산업도 유럽에서 미국을 거쳐 한때는 일본이 세계를 호령했고, 그 이후 한국이 물려받았습니다. 다음 순번인 중국으로 넘어가는 수순 역시 각오는 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엄청난 부가가치와 일자리를 창출하는 산업을 순순히 중국에 내줄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버티는 데까지 최대한 버텨 보고, 지배적 위치는 내주더라도 일정 수준 경쟁력은 유지해야겠죠.
다행히 당분간 세계 조선업 호황은 계속될 것이라는 예상이 우세합니다. HD한국조선해양은 지난 3분기 실적발표 컨퍼런스콜에서 선주들이 2050년 넷제로(Net-Zero, 탄소 순배출량 0) 스케줄에 맞추려면 이때까지 모든 조선소들의 건조능력을 총동원해도 부족하다는 장밋빛 전망을 내놨습니다.
전세계에 1000GT(총톤수) 이상 되는 선박이 10만척 이상인데, 친환경 연료 중 가장 많이 채택되는 LNG 연료추진선이 1200척 정도 운항되고 있고, 1000척 정도 건조중이라고 합니다. 다 합해서 전체의 2%정도입니다.
전세계 조선소들의 연간 건조능력은 1500척 정도로, 벙커C유를 때면서 매연을 뿜고 다니는 선박 9만여척을 전부 친환경 선박으로 교체하려면 단순 계산으로 앞으로도 60~70년은 걸리니, 수요는 차고 넘친다는 예상입니다.
이 예상이 맞는다면, 지금처럼 중국보다 한 발 앞서는 기술 개발과 상용화가 계속 이뤄진다는 전제 하에, 한국 조선업의 경쟁력은 이번 세기 정도까지는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봅니다. 아, 중국이 저 무지막지한 수요를 다 집어삼킬 만큼 무지막지하게 조선소를 짓진 말아야 될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