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장 덕에 세계 4위 석유화학 강국으로 도약
중국발 공급과잉에 최근 3년간 업황 부진 지속
경쟁력 제고 방안 발표…"산업계 자발적 산업재편 지원"
업황 부진 극복 위해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 필요
풍요의 시대에는 동물의 개체수가 늘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가뭄이 찾아오고 먹이가 줄어든 상황에서 많은 개체수는 서로에게 부담이 된다. 일부가 도태되지 않으면 다같이 굶어 죽어야 한다.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해 개체수가 조절되는 게 자연의 섭리지만, 인간이 자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동물의 종(種)을 유지하겠다며 좁은 틀에 가둬 버린 지금은 인간이 개체수 조절에 개입하는 게 불가피하다.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중국이라는 넓은 시장을 바탕으로 한때 풍요의 시대를 누려 왔다. 높은 경제 성장률을 보여 온 중국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지난 20년간 고성장하며 현재 생산능력 기준 세계 4위 석유화학 강국으로 도약했다.
하지만 지금은 풍요의 시대가 아니다. 중국 정부가 자급률 100%를 목표로 2019년부터 석유화학 공장 설비 증설에 나서면서 중국이라는 넓은 초원을 지배하는 건 더 이상 우리가 아니게 됐다. 내년 중국의 석유화학 생산능력은 글로벌 전체의 24%까지 확대될 것으로 분석된다.
중국발 공급과잉으로 국내 석유화학 산업은 최근 3년간 업황 부진을 겪고 있다. 롯데케미칼, 여천NCC, 효성화학 등 기업들은 2022년부터 적자를 이어오고 있다. 한국무역협회에 따르면 2023년 석유화학제품 수출액은 전년 동기보다 15.9% 줄어든 457억 달러(약 62조6000억원)이다. 이 중 대(對)중국 수출액은 17.6% 감소하며 국내 주요 나프타 분해시설(NCC) 평균 가동률도 73%로 주저앉았다. 과거 중국 수출 비중은 50%에 육박했지만, 현재는 40%를 하회하는 수준이다.
중국 덕분에 성장하고 중국 때문에 몰락하고 있는 셈이다.
이에 정부는 지난해 12월23일 국내 석유화학산업이 ‘전례 없는 위기 상황’이라고 진단하며 ‘석유화학산업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했다. 정부도 글로벌 공급과잉이 핵심원인이라며 2028년까지 문제는 심화될 것으로 내다보고 사업재편이 시급하다는데 뜻을 모았다.
구체적으로 ▲공급과잉 해소를 위한 NCC 설비 합리화 의사결정 촉진 제도정비 추진 ▲글로벌 시장 경쟁력을 보강하기 위한 원료 등 관련 규제 합리화 ▲고부가·친환경 사업 전환 위한 연구개발 유도 및 초기시장 창출 지원 등이 있다.
업계에서는 업황 부진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대대적인 구조조정이 가장 선행돼야 할 과제로 보고 있다. 국내 석유화학산업은 기업 개별의 문제보다 내수시장 부족, 높은 중국의존도, 중국 대비 적은 투자 자본, 무(無) 자원 등 구조적인 문제를 안고 있어서다. 자연 환경이 바뀔 경우 개체 수 조절이 불가피한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나 정부 주도의 구조조정 방안은 빠지면서 ‘속 빈 강정’이란 지적이 일고 있다. 정부는 ‘정부 주도의 인위적 사업 재편이 어려운 만큼, 산업계 스스로 독립적 전문기관을 통해 석화산업 재편계획 마련’이란 방침을 내세웠다. 결국 정부는 책임을 회피하고, 해결책을 기업에 전가한 형태가 됐다.
물론, 가능만 하다면 시장원리에 맞는 자율적 구조조정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다. 하지만 때론 종의 소멸을 막기 위해 인간의 개입이 필요하듯이, 산업의 몰락을 막기 위한 정부의 개입이 필요할 때도 있다. 지금의 상황을 초래한 중국의 석유화학 자급률 확대도 정부의 개입 아니었던가.
석유화학산업은 지난 50년간 한국 경제를 지탱했던 기둥이었다. 앞으로도 50년, 100년의 역사를 이어가려면 정부의 생태계 개입이 불가피하다. 지금이 ‘골든타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