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훈현 9단과 이창호 9단의 사제대결을 그린 영화 ‘승부’를 재미있게 봤다. 바둑영화는 어렵다. 액션이 없고 기사는 무표정의 포커페이스가 체질화되어 있어 ‘눈빛’ 말고는 승부의 순간을 포착하기 힘들다. 다행히 조훈현은 액션이 있다. 대국 중에 “망했다”고 중얼거리고(“상대가 망했다”는 뜻이다), 옛 노랫가락을 흥얼거린다. 다리 떨기도 유명한데 마치 섬세한 연주를 보는 듯하다.
제자 이창호에 의해 무관으로 전락한 조훈현이 포장마차에서 맥주잔에 소주를 따라 연거푸 두 잔을 마시는데, 실제라면 조 9단은 사망 위기에 직면했을 것이다(조훈현은 술을 못 마신다). 그래도 이병헌이 연기한 조훈현은 친근하다. 매우 닮았다.
전주 신동 이창호가 한국기원 연구생 실을 찾아가 ‘도장 깨기’ 비슷한 행동을 보여주는 대목은 무척 당황스러웠다. 득의양양한 이창호는 한 명씩 오지 말고 전부 덤비라면서 10여명을 상대로 다면기에 나선다. 현실에서는 결코 볼 수 없는 장면이다. 인내와 수줍음이 몸에 밴 현실의 이창호와 기고만장의 도장 깨기에 나서는 영화 속 이창호가 달라도 너무 달라 ‘이래도 스토리 전개에 이상이 없을까’ 걱정될 정도였다.
이창호 역을 맡은 배우가 유아인으로 넘어가면서 영화는 묵직해진다. 조훈현의 바둑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전류처럼 빠르고 꽃처럼 화려하다. 전쟁의 위험을 피하지 않고 과감하게 승부를 걸어간다. 이창호 바둑은 느리고 소박하다. 전투보다는 계산을 먼저 하고 위험을 피해 안전하게 승부한다. 이병헌의 조훈현과 유아인의 이창호는 복기를 하며 이런 식의 대화를 나눈다.
“승부란 기세야. 여길 두어야지. 끝낼 수 있을 때 끝을 내야지.”
“거길 두는 게 맞긴 하는데…. 혹시라도 위험해질 수 있어서요. 여길 두면 반집은 확실히 이긴다고 봤습니다.”
스승과 제자는 승부 방식을 놓고 치열하게 갈등한다. 실제 조훈현은 꼬치꼬치 추궁하는 스타일이 아니고 이창호는 그냥 고개 숙이고 말을 하지 않는 타입이라서 이런 식의 대화가 오갔을 리 없다. 영화는 말하자면 두 사람의 내면에 웅크리고 있는 대화를 끌어내 펼쳐 보인다. 영화 속 이창호는 할 말을 다한다. 그래도 유아인에게서 어느덧 이창호 냄새가 슬슬 풍겨온다. 힘들게 나만의 바둑을 찾아가는 이창호 모습이 실감 나게 다가온다. 이병헌 연기야 정평이 난 것이지만 유아인도 굉장한 배우라는 느낌이 든다.
사제대결은 결국 제자 이창호의 완승으로 끝난다. 모든 타이틀을 휩쓸었던 전관왕 조훈현은 이창호에 의해 무관이 된다. 한 장면이 떠오른다. 부슬비 내리는 밤의 종로 네거리. 이윽고 파란불이 켜졌는데도 조훈현은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다. 잊히지 않는 장면이다.
조훈현은 어린 이창호를 보며 ‘이 아이가 혹 재능이 없는 것 아닐까’ 의심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호랑이 새끼 키운다”고 했지만, 그는 “10년은 걸리겠지”라며 웃어넘겼다. 그러나 결과는 뜻밖이었다. 바둑 황제 조훈현이 어린 제자에게 참패한 것이다. 세상은 환호했다. 이창호란 바둑 소년은 느린 것으로 빠른 것을 제압했다. 바야흐로 스피드 시대인데 느린 것으로 빠른 것을 이기다니! 그 의미심장함에 찬탄이 쏟아졌다. 그러나 조훈현은 자신의 바둑관을 믿는 사람이다. 승부에선 졌지만, 이창호 바둑이 조훈현 바둑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해본 적은 한 번도 없는 사람이다.
조훈현은 다시 일어선다. 세계 대회에서도 우승했고 이창호의 전관왕을 저지하기도 했다. 하나 대세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었다. 이창호는 이후 15년간 세계를 제패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전성기의 조훈현과 전성기의 이창호가 맞붙는다면 누가 이길까. 조훈현과 이창호는 무려 22년 차이다. 아득한 세월을 감안하면 조훈현 쪽이 잘 버텼다는 느낌이다(조훈현은 이창호를 상대로 314전 119승 195패를 기록했다).
박치문 바둑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