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제작일지] 영화 <반구대 사피엔스>, 다큐멘터리 <반구대별곡> “⑲ 우라까이”

2024-10-04

똑같은 개를 사 줄게요

종종 뉴스 사회면에서 어찌어찌 남의 개를 죽게 했는데 그에 대한 보상이 같은 견종이라거나, 기르던 반려동물이 죽자 복제한 동물에게서 위안받는다거나, 하는 내용을 볼 때면 켜켜이 쌓아가는 시간이란 가치에 대한 파렴치함과 ‘THE’가 아닌 ‘A’라는, 존재에 대한 무례함을 느낀다.

‘개새끼’라는 말에 긴장하며 눈치를 보는 내 개들은 다른 사람이 이 말을 하면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저음으로 그 말을 해도 장난인지 아닌지 눈치챈다. 들릴락 말락 아주 작은 소리거나 입안에서만 머무는 한숨이라도 내 기분이 안 좋다는 걸 즉시 알아챈다. 화가 나 있을 때면 두 마리가 2미터쯤 떨어져 대각선으로 평행하게 엎드려 온몸의 감각으로 주인 눈치를 보다가 한 뼘씩 다가와 어느새 발밑에 앉아 있는 이놈들을 보고 어떻게 화를 누그러뜨리지 않을 수가 있을까. 실의에 빠져 있을 땐 앞발을 모으고 끝없이 앉아 있다가(개는 ‘기다려’라는 말에 따라 부동자세로 앉아 있거나 서 있는 것을 무척 힘들어한다고 했다. 물론 내 개들은 그 말을 모른다) 감정의 틈새가 벌어지자마자 쓱 와서 손을 핥아주는데 어떻게 회복하지 않을 수 있나.

똑같다는 말은 똑같은 ‘척’이나 똑같은 ‘듯’한 것일 뿐이다. 초등학교 산수 시간에 배웠던 오차의 범위는 내가 밥 먹이는 동물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타이탄의 세이렌>(2022, 커트 보니것, 강동혁 역, 문학동네)에서 끊임없이 언급되는 중요하면서도 유일하며 추상적이자 구체적인 에너지원인 UWTB(Universal Will To Become; 무언가가 되려는 우주적 의지)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신의 대척점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라면 똑같다는 말은 존재해서는 안 되고 존재할 수도 없는 의미가 된다. 그저 똑같기를 강요하거나 강요당하는 것이다. 짝퉁으로써 명품의 권위에 편승하려는 게으른 도둑질 심보와 같다. 난 이런 사기(詐欺)질을 아주 싫어한다.

타자(他者) 흉내 내기는 치명적 도둑질

영화 <태양은 가득히>(1960, 르네 클레망)와 <리플리>(2000, 안소니 밍겔라)는 알랭 들롱과 맷 데이먼이었으므로 이 거짓말쟁이들이 매력적인 캐릭터가 되었다. 원작인 <재간둥이 리플리>(1921,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톰 리플리도 1차 세계대전 직후 거짓말같이 다 망가진 세상에서 유쾌하면서도 씁쓸한 캐릭터로서 용서받을 수 있었다. <써머스비>(1993, 존 아미엘)는 <귀여운 여인>(1990, 게리 마샬)에서 귀엽고 순진하며 젊고 멋지기까지 한 엄청난 부자로 출연했던 리차드 기어가 이 영화에서 다정하기 짝이 없는 인물로 등장해 세상의 모든 매 맞는 아내들에게 당신은 폭력에서 벗어나 사랑받을 자격이 있음을 증명해 주었기 때문에 못된 써머스비를 흉내 내는, 착하지만 캐릭터를 훔친 도둑놈 써머스비를 용서했다. <화차>(2012, 변영주)에서 남의 인생을 뱀 허물처럼 변태하는 김민희가 극 중에서 기찻길로 몸을 내던지면서 스스로 단죄했기에 관객은 그녀의 쓰레기 같은 삶에 연민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위험한 독신녀>(1992, 바벳 슈로더)는 따라 하기에 관해 치명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심각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는데, 가장 사실적이고 현실적일 수 있다. (이 영화의 원제는 으로, 여성의 사회적 자립을 전제로 하면서도 백인 여성만이 사회적 주목을 받을 수 있다는 인종 차별의 문제를 내포했지만 간사하게도 자극적으로 번역했다. 당시엔 수입업자들이 대체로 그런 편이었는데, 번역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여성 비하적인 느낌을 주고 말았다.)

브리짓 폰다는 남자 친구와 헤어지면서 심리적 허기를 달래기 위해 여성 룸메이트를 구한다. 세련되고 사회적 위치가 공고한 폰다에 비해 이 룸메이트는 외모가 촌스럽고 변변한 직업도 없다. 룸메이트에게 폰다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룸메이트는 폰다에게 심리적 위안을 주면서 그녀의 삶에 깊이 파고들었고, 폰다가 룸메이트에게 깊은 신뢰감을 가질 무렵부터 그녀는 폰다의 삶을 흉내 내기 시작한다.

그 시작은 긴 머리를 싹둑 잘라 폰다의 짧은 머리 모양과 똑같이 하는 것이었고, 옷차림새와 말투, 사소한 행동거지를 따라 하더니 구두까지 훔쳐 신으면서 그런 짓을 경멸하는 폰다의 남자 친구 눈을 뾰족한 하이힐 굽으로 콱 찍어 살해한다. 룸메이트는 자신도 그 무엇을 좋아한다면서도 그 분야에 관해 아는 게 없고, 특정 행동을 자기 것인 양하면서도 원래 모습 사이에서 자기분열을 종종 일으켰으며, 폰다가 보지 않는 때 배우가 리허설하듯 폰다의 특정 행동들을 연습한다. 어느 순간 룸메이트의 겉모습은 폰다보다 더 폰다스럽게 됐다. 폰다는 룸메이트의 행동들을 처음에는 동질감으로 여기면서 자신의 것들을 유쾌하고 능동적으로 공유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베끼기를 일삼는 그녀에게 혐오감을 느낀다. 폰다의 모든 것을 룸메이트가 가져가고, 폰다는 그 룸메이트와 같은 모습을 보이기 싫어 오랜 시간 누적해 온 말과 행동과 습관과 물건들을 버리면서 주객이 전도된다.

껍데기는 룸메이트가 가져가고 폰다에게는 속살이 드러난 본질만 남았다(놀랍지만 현실적으로 대중은 본질보다 껍데기를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룸메이트의 본질로는 결코 선망하던 폰다가 될 수 없고, 폰다는 원래의 모습을 도둑질당했으면서 도둑놈을 회피한다. 룸메이트는 가짜 삶의 끝인 파멸에 이르게 되고, 폰다는 도둑질당했던 모습을 되찾길 거부한다. 오랜 시간 누적해 온 폰다의 삶은 껍데기가 뜯겨나간 채 흉터만 남았다. 폰다가 폰다인 듯 폰다가 아니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기 계발서(書)들을 혐오한다

난 중요한 발표가 있거나 협상이나 회의가 있을 때 핵심에 관해 실제 말과 표정과 몸짓을 리허설한다. 짧은 시간 내에 타인을 설득할 타고난 재주가 없어서 시나리오 대사를 쓰듯 연습해야 그 일을 완수할 수 있다(난 앞뒤 재지 않고 말부터 일단 내뱉는 사람을 경멸하면서도 위기를 모면할 줄 아는 그 순발력을 부러워한다. 돌아서면 화가 치밀어오르지만). 논리적인 글을 쓰기 위한 어떤 이론서를 읽고 내 리허설 방식에 위안을 얻은 적이 있다. 누가 보면 미친 사람 모습처럼 보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런 내 모습을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 했는데 이 방법을 성공적으로 잘 활용하는 사람이 있었구나, 하고. 이때를 제외하곤 대체로 자기 계발서를 읽고 삶이 바뀌기를 기대하는 것에 혐오감을 가지고 있다. 폰다의 룸메이트처럼 겉모습만 흉내 내길 강요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찰리 채플린의 자서전을 읽었다. 세로 문장에 한자까지 섞여 있는 3센티미터쯤 되는 두꺼운 양장본이었다. 책을 덮으면서 펑펑 울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저 채플린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불쌍하다고만 생각한 덜 성숙한 측은지심 때문이었을 것이다. 6센티미터쯤 되는 세계영화사 전공 서적에서 찰리 채플린이 사업 면에서는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에디슨의 도둑심보가 얼마나 괘씸한 것인지 알게 되면서 수많은 자서전에 영향받지 않은 내 삶에 자부심을 가졌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우라까이’의 대가(大家)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판에 들어간 이후보다 그 전에 영화를 훨-씬 더 많이 봤다. 하루에 몇 편씩 보고도 그 영화들을 대체로 다 기억했다. 편집증적인 메모 습관 덕이다.

처음 영화판에 들어갈 때 작가로 들어갔다. 그런데 사전제작이 아니라 방영과 동시에 제작이 진행되던 방송 드라마에서는 작가의 위상이 큰 것과 달리 영화는 감독이 활자를 이미지화하면서 충분히 자신의 의지대로 수정할 충분한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대적으로 영화 쪽에서는 감독이 주도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연출 쪽으로 빠르게 전향했다. 하고 싶은 너무 많은 말을 표현할 줄 몰라서 그 수단으로 영화를 선택한 것인데 영화에서 내 머릿속을 표현할 수 있는 직군은 작가가 아닌 감독이었기 때문이다(다행히도 우리나라 영화산업계는 감독이 시나리오와 스토리보드까지 쓰기를 요구한다).

다른 콘텐츠에 영향을 받지 않기 위해 영화를 시작한 이후로 다른 영화를 잘 보지 않았고 그렇게 많이 읽어대던 책도 잘 안 읽었다. 불행하게도 이건 습관이 돼서 이젠 1년에 영화를 100편도 보지 않고, 전공 서적 외에는 책을 50권도 안 읽는다.

그런데 이런 나의 무모함에 쿠엔틴 타란티노가 강력한 충격파를 던졌다. 많이 보고 많이 알아야 위대한 작품이 나온다는 사실. ‘우라까이’를 하려거든 타란티노처럼 해야 한다. 박찬욱 감독과 류승완 감독은 타란티노의 작품에 ‘우라까이’ 된 영화들을 거의 또는 전부 다 읽어낸다는데 민망하게도 난 몇 편 못 찾아낸다.

논문을 쓸 때 지도교수가 그랬다. 이 선생. 논문을 쓰는 건 특허가 아니라 실용신안처럼 해야 해. 내가 영화판에 처음 들어가서 만난 존경하는 R 감독도 그랬다. 민정아. 하늘 아래 완전히 새로운 건 없어. 많이 봐야 해. 그리고 거기서 네가 새롭게 창작할 수 있는 빌미를 찾아내.

자칫 잘못하다간 이상한 괴물이 나올지도 모른다, 이 ‘우라까이’라는 놈이.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것이라고 잘못 내놔도 그럴 수 있다. 영화는 독립영화건 예술영화건 대중의 선택을 받아야 한다. 소수든 다수든. 그러므로 익숙한 데에서 새로운 변주가 필요하다. 그런데 아직 마음으로 협상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불안하다. 내 첫 장편이 이상한 ‘우라까이’ 괴물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조바심 때문에.

이민정 영화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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