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스타트업 투자에 붙은 '계엄' 꼬리표[윤민혁의 실리콘밸리View]

2024-12-29

“한국은 끝장이 났습니다. 글로벌 스타트업들이 모두 실리콘밸리로 몰려들어 투자금을 받아내려 혈안인데 굳이 정치적으로 불안한 국가에 투자할 벤처캐피털(VC)이 어디 있겠습니까. 한국계 스타트업이라는 꼬리표는 이제 ‘디메리트’입니다.”

12월 3일 계엄 다음 날 한 한국계 미국인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고위 관계자가 전한 한탄 섞인 말이다. 비슷한 시기에 열린 한인 송년 모임에서는 그 어느 때보다도 ‘그린카드(영주권)’에 관한 얘기가 진지하게 오갔다. “정치 난민 신청을 해야 한다”는 농담 섞인 주장에 일말의 설득력이 느껴져 참담함을 감출 수 없었다.

미국인들의 반응에는 민망함마저 느껴졌다. “한국에 여행 갈 계획인데 어디가 좋으냐”며 들뜬 목소리로 묻거나, “최근 한국에 다녀왔다”며 사진을 보여주기 바쁘던 이들이 “도대체 한국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이냐”며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동안 농담 삼아 “한국은 위험천만한 후진국인 미국과 달리 밤새 밖을 걸어다녀도 안전한 나라”라며 현지인들을 놀려왔는데 이제는 꺼내기 쉽지 않은 말이 됐다.

미국 정부의 “한국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확인했다”는 말에도 속이 쓰리기만 하다. 회복이 필요할 만한 ‘손상’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탓이다. 한국은 8년 새 두 번의 대통령 탄핵소추를 겪었다. 21세기로 범위를 넓히면 세 번이다. 2000년대 들어 취임한 대통령 5명 중 3명이 탄핵에 휘말렸고 2명은 감옥에 갔으며 한 명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다른 국가의 투자자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이토록 정치적으로 불안한 국가가 없어 보인다.

계엄령은 극단적 정쟁을 넘어서는 문제다. 외신이 ‘계엄령’이 무엇인지 상세히 설명한다는 건 민주주의가 성숙한 국가에서는 ‘해설’이 필요할 정도로 낯선 일이라는 방증이다. 우리나라는 북한의 존재만으로도 이미 위험 국가라는 인식을 안고 산다. 이제는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인식까지 갖게 됐다. 민주주의는 시장경제의 선결 과제다. 2024년 세계 10위권 경제 대국에서 냉전 시기 개발독재국가에서나 통용될 일이 일어났다. 이제 누가 한국 경제를 신뢰하겠는가.

경제적 타격은 이미 현실화했다. 환율 폭등으로 한국에 본사를 두거나 한국으로부터 투자를 받은 실리콘밸리 스타트업들은 물론 현지에 진출한 한국계 VC 역시 투자에 제약을 받으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현지 관계자는 “권한대행의 권한대행까지 이어지는 희대의 정치 상황 속에서 원화에 대한 신뢰가 더 추락하고 있다”고 전했다. 수출 기업들도 고환율을 반길 수 없는 처지다. 단기적으로 반도체·전자제품 등 완제품 가격경쟁력에 도움이 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공급망 타격이 더 아프다. 남한은 수입 없이는 내수도 돌아가지 않는 나라다. 고환율 지속에 체력이 약한 협력사가 하나둘 쓰러지면 대기업도 생존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환율은 시작일 뿐이다. 더 큰 문제는 대외 신뢰도 하락으로 인해 거래가 단절되고 신규 거래 창출에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실리콘밸리 현지 대기업 영업망은 ‘코리아 디스카운트’에 대한 우려가 어느 때보다 높다. 이제 테크 전 영역에서 한국산의 대체재가 없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삼성전자·SK하이닉스 메모리의 안정적 공급이 의심된다면 마이크론을, 디스플레이 수급이 불안하다면 BOE를 찾으면 된다. 미국은 물론 중국·대만·일본 경쟁사들이 쾌재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해답은 하루빨리 정국 혼란을 종식시키는 것뿐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대선 유불리에 따라 말장난 수준의 정쟁을 벌이며 시간 낭비 중이다. 그 모습이 시시각각 외신을 통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며 국제사회의 조롱거리로 전락하고 있다. 고통과 부끄러움은 국민의 몫이다. “기업은 2류, 관료는 3류, 정치는 4류”라던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30년 전 일갈이 뼈저리게 와닿는 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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