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왕의 목은 단두대에서 잘렸지만, 왕의 통치 방식은 살아 있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으로 여겨지는 자유와 평등의 이념을 만천하에 공표한 프랑스 대혁명은 루이 16세를 단두대로 처형하고 공화국을 선포함으로써 절대왕정이 지배하던 ‘앙시앵레짐’, 즉 구체제를 전복했다. ‘왕의 목’은 어떤 견제도 없이 정치권력을 집중화한 권력 체제를 상징한다. 절대군주인 왕이 사라지면 인민의 삶이 좋아질 것이라는 혁명의 약속과 기대는 빗나갔다. 프랑스 혁명이 구체제를 무너뜨린 후 공화정, 제정, 군주정으로 국가 체제가 바뀌며 불안한 정치 상황이 지속됐다. 사실상 독재자로서 프랑스를 지배했고 숙청을 통한 공포정치로 많은 반대파를 단두대로 보낸 로베스피에르 자신도 단두대의 희생양이 되었다. 왕이 사라지고, 왕의 자리에 수많은 다른 정치 지도자들이 어떤 이름으로 등장하건 ‘통치 방식’이 바뀌지 않는다면, 국민의 자유와 평등을 위협하는 ‘구체제’는 여전히 지속된다.
민주주의가 제도화된 오늘날 프랑스 대혁명에 대한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말을 떠올리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치권력이 민주주의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루이 16세 처형이 구체제의 종말을 선언하는 듯했지만, 단두대가 멈춘 자리에는 새로운 권력과 새로운 형태의 복종이 자리 잡았다. 왕은 사라졌지만, 그를 대신할 제도와 법, 규율의 체계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마찬가지로 민주적 헌법 질서를 파괴한 ‘독재자’를 법률적 절차에 따라 몰아냈다고 해서 ‘독재 체제’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푸틴이나 시진핑과 같은 인물을 차치하고서라도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같은 정치인들은 모두 선거를 통해 선출되었지만, 법률을 통해 합법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독재자는 사라졌지만,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독재의 통치 방식은 여전히 살아 있다. 신권위주의적 독재의 해결책은 독재정권이 몰락한 후에도 강한 유혹의 형태로 생존할 것이다. 진정한 위험은 끔찍하고 경악스러운 위기가 드디어 끝나고 이제는 사라졌다고 생각할 때 찾아온다. 어처구니없는 계엄 선포로 윤석열 전 대통령이 탄핵당했다고 독재의 유혹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합법 독재화의 징후 점차 뚜렷
요즘 이재명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정치적 행태를 보면 부쩍 이런 의심이 든다. 물론 이 대통령이 분열의 정치를 끝내고 “모든 국민을 아우르고 섬기는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다”는 취임 약속을 한 지 4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 약속이 지켜지길 여전히 기대하고 간절히 바라지만, 반대의 징후가 곳곳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보여 우려된다.
프랑스 대혁명 때와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시대에도 구체제는 ‘독재의 통치 방식’이다. 루이 14세가 “나는 곧 국가다”라고 말한 것처럼 구체제의 주권은 왕권이었다. 구체제는 지방 귀족들에게 권력을 분산시키기보다는 중앙정부의 행정 시스템을 강화해 국가의 모든 권력을 왕에게 집중시켰다. 구체제의 특징은 바로 견제 장치를 약화하고 권력을 집중하는 독재이다. 물론 이 모든 것이 ‘법의 이름’으로 이루어졌다.
민주주의 시대에도 이러한 구체제의 유혹은 강렬하다. 21세기 들어 다수 국가에서 선거는 유지하지만, 법과 제도를 무기화해 권력 집중을 진행하는 신권위주의가 확산하고 있다. 이 정권들은 쿠데타보다 법률 개정, 기관 재편, 행정권 남용 같은 ‘합법성’의 외피로 민주주의의 실질을 잠식한다. 푸코의 경구는 여기서 날카롭게 되살아난다. 왕은 없다. 그러나 왕처럼 작동하는 구체제의 행태는 살아 있다. 신권위주의는 법 그 자체를 통해 독재적 통치를 정당화한다. 우리는 이러한 통치 방식에 ‘독재적 법률주의’ 또는 ‘합법적 독재’라는 기괴한 이름을 붙일 수 있다. 이러한 통치 방식은 법과 절차를 지키는 듯 보이지만 법률과 사법, 제도와 권력기관을 재설계해 견제 장치를 단계적으로 해체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의 최대 위협이 된다.
윤석열 전 대통령의 멍청한 계엄 선포 덕택에 정권을 잡은 이재명 대통령과 민주당 정권은 내란 세력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합법적 독재’의 길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윤 전 대통령이 여소야대의 불리한 상황을 대화와 타협을 통해 정치적으로 해결하는 대신 위헌적이고 위법적인 계엄 선포를 선택한 것은 군사독재를 경험한 국민 대다수에게 매우 폭력적으로 다가왔다. 그가 저지른 정치적 악은 헌법적 질서를 파괴한 것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에 필수적인 견제의 힘을 완전히 소멸시킨 것이다. 국회의 절대다수를 차지한 이재명 정권은 이제 어떤 견제도 없이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모두 ‘합법적으로’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권력은 부패하고, 견제가 없는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 합법 독재의 위험이 곳곳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폭력이 가시적이면, 저항은 쉽다. 그 목표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합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견제 장치의 무력화는 쉽게 인지되지 않고, 그만큼 저항하기 어렵다. 우리가 합법적 독재화에 민감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직 독재라고 말할 수는 없어도 합법 독재화의 경향을 드러내는 징후가 점차 뚜렷해진다.
첫째, 정치인들의 말이 더 적대적이고 폭력적인 경향을 띠기 시작한다. 정치적 현안을 다루거나 문제점을 지적할 때조차도 극단적인 낱말이 난무한다. 윤석열은 법원에서 내란죄로 ‘사형’ 선고를 받을 것이라는 말은 약과다. 이 대통령은 연이은 산업재해 사고로 노동자들이 숨진 사실을 언급하며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이라고 질타하고, 식품 가격의 폭등과 관련해 “조선시대 때도 매점매석한 사람을 잡아 사형시키고 그랬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사태의 객관적 분석과 대책은 없고 과격한 말만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시원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러한 말은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은 제거하고 싶다는 속내로 읽힐 수도 있다.
독재 막을 견제 장치 복원해야
둘째, 모든 일을 세세하게 챙기며 간섭하는 관리자 스타일은 언제나 독재의 경향을 보인다. 세부 사항까지 직접 통제하려는 사람은 어떤 조직에서든 민주적이기보다는 권위주의적이다. 그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인상을 주어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오만하고 독재적이다. 이런 사람들은 일을 남에게 쉽게 맡기지 못한다. 이 대통령은 10월 말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전 국민 대청소 운동’을 제안했다. 단순한 환경 정화를 넘어 국가 브랜드 가치 향상을 위한 것이란다. 그의 꼼꼼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세관 마약 수사 외압 의혹과 관련해 제보자인 백해룡 경정을 수사팀에 파견하라고 지시하고, 국정감사에 임하는 공직자들은 진실을 말하고 겸손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모두 맞는 말이다. 문제는 세세한 일까지 간섭하는 리더십은 조직의 자율성을 파괴하고, 정체성을 잃게 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세부를 통제하려는 권력은 결국 신뢰를 무너뜨리고 자율을 억압한다.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독재적 통치 방식은 그대로다.
셋째, 민주주의에 가장 위험한 것은 청산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견제 장치를 무력화한다는 것이다. 입법권과 행정권을 장악한 이 정권은 이제 모든 견제 장치를 무력화하고 있다. 하는 일이 정당한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이 제도 개혁을 통해 국민에게 이로운 결과를 가져올지 아닌지도 별로 중요하지 않다. 합법적이기만 하면 된다. 최상의 목적은 정권의 유지와 연장이다. 오랜 기간 관례였던 것도 폐지된다. 그동안 관례에 따라 원내 2당이 맡았던 법사위원장 자리도 집권여당이 가져갔다. 합법적으로. 그동안 삼권분립의 취지에 따라 대법원장은 국감 출석 후 인사말을 하고 퇴장했던 관례도 깨졌다. 집권여당 주도 법사위는 이런 합법적 방식으로 사법부를 흔들고 압박한다.
이 모든 게 기우였으면 좋겠지만, 견제되지 않는 권력은 독재화한다. 우리가 윤석열의 계엄 선포로 훼손된 헌법 질서를 바로 세우려면 무엇보다 견제 장치를 복원해야 한다. 법이 혁명의 칼을 대신하는 정치적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독재의 그림자가 더 짙어지기 전에 합법 독재에 저항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권력자가 스스로 자제하기를 바라는 것은 순진한 소망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