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세계 50개국 이상이 가입한 영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은 한때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불린 대영제국(大英帝國)의 유산이다. 영국 식민지에서 독립한 국가들이 대거 회원국으로 참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중에서도 15개국은 영국 국왕을 자국의 국가원수로 섬긴다. 영국이야 당연하고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도 그렇다. 2022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별세하고 그의 아들 찰스 3세가 새 국왕에 오른 뒤 호주와 뉴질랜드에선 ‘이참에 군주정을 폐지하고 공화정으로 바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영국 국왕 대신 자국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을 국가원수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반면 캐나다는 영국 왕실을 향한 애착과 충성심이 여전히 강한 것으로 평가된다.

캐나다와 마찬가지로 영국 식민지로 출발한 미국은 1776년 독립을 선포했다. 식민지에 대한 영국 정부의 지나친 세금 부과에 불만을 느낀 주민들이 들고 일어난 결과였다. 7년 가까운 전쟁 끝에 1783년 미국이 독립국 지위를 얻자 그에 반대하는 영국계 주민 상당수가 캐나다로 이주했다. 독립 이후 꽤 오랫동안 미국은 영국, 그리고 영국 지배 아래의 캐나다를 ‘안보 위협 세력’으로 간주할 정도였다. 식민지에서 자치령을 거쳐 완전한 독립국이 된 뒤에도 캐나다는 변함없이 영국 편에 섰다. 그런 캐나다를 엘리자베스 2세는 몹시 사랑했다. 1952년부터 2022년까지 70년에 걸친 재위 기간 동안 엘리자베스 2세는 캐나다를 22차례나 방문할 정도로 강한 애정을 드러냈다.
올해 1월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당선인 시절부터 캐나다를 합병하고 싶다는 속내를 공공연히 내비쳤다. 캐나다를 “미국의 51번째 주(州)”로 규정하는가 하면 캐나다 총리를 향해 “주지사”(Governor)라는 모욕적 표현도 서슴지 않는다. 캐나다 국민 사이에 반미 감정이 들끓은 것은 물론이다. 일각에선 ‘미국이 이런 식으로 나오는데 우리의 국왕은 대체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나’라는 불만도 터져 나왔다. 영국 국왕이자 캐나다 국왕을 겸하는 찰스 3세가 트럼프의 도를 넘은 발언에 침묵만 지키는 점을 비판한 것이다. 다만 영국 국왕은 정치적 현안에 관해 발언을 삼가는 것이 전통이다. 또 찰스 3세 입장에선 영국과 미국의 친선 관계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찰스 3세가 2022년 즉위 이후 처음 캐나다를 방문하기로 해 눈길을 끈다. 최근 연방의회 하원 총선거를 치른 캐나다는 오는 27일 새 하원의 개원식을 여는데, 이 자리에 찰스 3세가 캐나다 국왕 자격으로 참석해 개원 기념 연설을 한다는 것이다. 마크 카니 캐나다 총리는 지난 2일 총선 후 처음 가진 기자회견에서 이 같은 사실을 기습 발표했다. 영국 국왕이 캐나다 하원 개원식에서 연설하는 것은 지난 1977년 당시 엘리자베스 2세 이후 48년 만의 일이다. 카니는 트럼프를 겨냥해 ‘우리 캐나다도 국왕이 존재하는 독립 주권 국가’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싶었던 걸까. 찰스 3세의 캐나다 방문에 트럼프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지 주목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af103@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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