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등학교 교과과정에서 천문학과 관련된 내용을 그나마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과목은 지구과학이다. 이건 흥미롭다. 사실상 지구 빼고 그 바깥의 모든 걸 이야기하는 천문학이, 대한민국 교과과정에선 지구과학의 하위 분야로 여겨진다.
지구과학은 학생들에게서 딱히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학생들 대부분 물리나 화학을 주전공으로 삼는다. 실제로 수요 자체가 너무 적다 보니 사교육 시장에서도 지구과학 강사 수는 훨씬 적다. 나는 과학 덕후들만 모였다는 과학고를 나왔는데, 그 안에서도 지구과학 주전공 학생은 다섯 명도 채 되지 않았다. 그중에서 천문학을 진로로 희망하는 학생은 사실상 나 한 명뿐이었다.
평소에는 찬밥 신세였던 지구과학에 갑자기 사람들이 몰리는 시즌이 있다. 바로 수능 직전이다. 그 시점에서, 물리나 화학은 점수를 단기간에 올리기 어려운 과목이다. 그래서 많은 학생이 지구과학을 도피처로 삼는다. 지구과학은 수험생들에게 굉장히 기능적으로 쓰인다.
솔직히 말해서, 현재 교과과정에 등장하는 지구과학은 이상한 변종이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과목 안에 너무나 방대한 세계가 들어 있다. 돌멩이를 배우고, 날씨를 배우고, 바다에 가고, 우주까지 간다. 지질학, 기상학, 해양학, 천문학이라는 별도의 과학 학문에서 다루는 정말 방대한 내용이다. 그런데 그 네 가지를 모두 모아 단 1년짜리 교과목에 욱여넣었다. 그런 과정에서 각 고유 학문의 겉핥기 수준의 얕은 지식만 포함됐다. 돌멩이, 구름, 바닷물에 이어 별도 조금 핥아본다. 그러니 수험생 입장에서 지구과학은 만만하고 쉬워 보일 수밖에.
여기서 큰 부작용이 발생한다. 당장 수능에서 만족스러운 점수를 채우기 위해, 일단 전략적으로 지구과학을 선택한다. 그리고 꽤 괜찮은 점수를 받는다. 그러면 학생은 이런 착각에 빠진다. “내가 지구과학 분야에 소질이 있구나. 내 길은 여기다!” 막판에 지구과학 과목을 선택해 좋은 점수를 받은 학생들이 지구과학에서 배웠던 내용들을 더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학과에 진학한다.
이건 수험생에게 큰 불행으로 돌아온다. 물리가 어렵고 싫어서 도망쳐온 곳이 천문학과라니. 이제는 난해한 방정식들로부터 벗어나 밤하늘의 별빛이 선사하는 낭만 가득한 캠퍼스 생활을 할 거라 기대했겠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천문학과에서는 4년 내내 물리만 한다. 지질학과, 기상학과, 해양학과 그 어디를 가도 마찬가지다.
사실 과학 분야의 구분은 무엇을 대상으로 연구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뿐, 연구 방법에는 큰 차이가 없다. 물체 A와 물체 B를 두고 물리 문제를 풀면 그건 물리학이다. 구름 A와 구름 B를 두고 물리 문제를 풀면 기상학이다. 돌멩이 A와 돌멩이 B를 두고 물리 문제를 풀면 지질학이다. 그리고 별 A와 별 B를 두고 물리 문제를 풀면 천문학이다.
사실 모든 과학은 물리학의 하위다. 다루는 대상이 돌멩이, 구름, 별인지에 따라서 지질학, 기상학, 천문학이라는 다른 이름으로 불릴 뿐이다. 그러므로 물리가 싫어서 천문학과로 도망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제 발로 더 심오하고 난해한 물리학의 세계로 들어온 꼴이라서다. 만약 정 물리가 괴롭고 어렵다면, 물리가 전혀 묻어 있지 않은 과학 바깥의 길을 고민하는 편이 더 합리적이다.
난 지구과학 과목이 이렇게 억울하게도 하찮게 다뤄지고, 또 그로 인해 수험생들의 잘못된 진로 선택까지 이어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참 안타까웠다. 각자 너무나 방대하고 어려운 분야지만 애초에 지구과학이라는 고등학교 교과목 자체가 이상하게 난도질당해버린 바람에 학생들은 각 분야의 진가를 제대로 맛보지도 못한 채 잘못된 이미지만 얻고 있다고 생각했다.
가끔 천문학자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공부해야 하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내가 이 세상 모든 천문학자의 삶을 대변할 수야 없겠지만, 단 하나만큼은 자신 있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천문학자가 되기 전에 일단 과학자가 되기로 마음먹어야 한다. 과학자가 된 다음에 그중 어떤 분야를 주로 연구하는 과학자가 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세계적인 파스타 요리사가 되고 싶다면, 일단 요리의 기본기를 갈고닦는 훌륭한 요리사 자체가 먼저 되어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수험생들의 운명을 결정하는 큰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다. 과학자, 이공계인의 길을 택한 고마운 학생도 많을 것이다. 난 그 선택을 응원하고 싶다. 그리고 학생들이 후회하지 않기를 바란다. 부디, 물리가 싫어서 4년 내내 물리만 하는 곳으로 도망가는 실수만 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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