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학술원 회원 조동일 교수가 얼마 전 대전에서 ‘김만중의 위상 평가’라는 학술 발표를 했다. 긴 발표문을 요약한 내용이 압권이다. 사모님 전언에 따르면, “아무래도 발표 시간이 부족하다고 새벽 2시부터 일어나셔서 한쪽 발표문 준비하셨습니다. 발표의 대가가 아직도 발표가 긴장되느냐고 했더니 긴장하지 않은 발표가 없었다고 하십니다. 그렇게 담대한 발표를 하셔도 항상 꼼꼼히 준비하시고 분장실의 배우처럼 특히 서두 부분은 대사 연습도 하십니다. 현장에서는 원고 재현이 아닌 원고와 현장을 휘어잡는 순발력에 더 기대어 발표를 하시는 거 같지만요.” 학문하는 자세가 바로 살아가는 일상과 연결된 것을 보고 감동한다.
김만중이 한글 소설 <사씨남정기>와 <구운몽>을 여성 독자를 위해 쓴 줄은 누구나 안다. 漢譯(한역)이 있어 남녀 공유물이 된 것은 생소하다. 이면에 탐구 거리가 있는 줄 학자 조동일이 알려준다. “<사씨남정기>에서는 지배이념 윤리관을 아주 조심스럽게, 반발을 사지 않는 방법으로 뒤집었다. 사씨의 道心(도심)은 억지여서 위선이고, 교씨의 人心(인심)이 자연스러워 오히려 참된 것임을 차츰 알아차리도록 했다. <구운몽>은 삼층구조로 이루어져, 佛家(불가)의 一切幻夢(일체환몽) 아래에 儒家(유가)의 盡忠保國(진충보국)이, 그 아래에 인생의 男女逆轉(남녀역전)이 있다.” <사씨남정기>에서는 하층 여성의 삶을 향한 질주가, <구운몽>에서는 여성이 주도권을 가지고 남성을 선택하고 유혹해 사랑을 성취하는 다양한 방식에서 남녀귀천의 역전이 일어난다. 대등한 세상을 앞서 열어간 김만중의 위상을 후학들이 평가하고 이어가야 하리라.
조동일 교수가 김만중과 데카르트(Descartes)를 비교하여 평가한 것이 감동스럽다. 동시대인으로 학문 방법 탐색에 관한 노력을 데카르트가 해서 얻은 명성은 널리 알려졌는데, 김만중은 어떻게 했는지 예찬자들도 모르고 있다고 한다. 사상 통제가 심한 기독교 때문에 데카르트는 방법 탐색을 삶에서 분리해 수학적으로 하고, 독단이 심하지 않은 유학 덕분에 김만중은 방법 탐색을 일상 사물을 고찰하면서 진행해, 물리학과 같은 작업을 했다. 수학적 방법은 받들어야 할 상전이 되고, 물리학적 방법은 힘을 보태는 일꾼인 줄 알면 김만중을 깊이 이해하고 본받아야 하리라.
우리는 중세 시대 선조들이 한 큰일에 대한 인식이 많이 부족하다. 조동일 교수는 힘자라는 대로 찾아내어 소개하고 있다. 올 초에 나온 <문학으로 철학하기>가 대표적인 책이다. 김만중은 성리학이 지배하는 시대에 기일원론을 펼친 서경덕과 양명학을 주도한 장유를 평가해 철학사의 심층을 꿰뚫어 보았는데 장유에 대한 글 한 대목을 살펴보자.
又有人이 : 또 어떤 사람이
等是圖經上所見(등시도경상소견)이나 : 그림책에서 본 것은 같으나,
而其人素俱惠性(이기인소구혜성)하여 : 그 사람이 본디 지혜로운 본성을 갖추어
能識丹靑蹊逕(능식단청혜경)하고, : 능히 붉고 푸른 지름길과 작은길을 식별하고
文字脈絡(문자맥락)에서 : 문자의 맥락에서
不滯於陳迹(불체어진적)하고, : 지난날의 자취에 얽매이지 않고,
不眩於衆說(불현어중설)하면, : 여러 사람의 주장에 현혹되지 않으면
往往想出山中珍景(왕왕상출산중진경)이 : 이따금 산중의 참다운 모습을 생각해내서
如在眼中(여재안중)이라. : 눈으로 보는 것 같다.
此雖非斷髮令上所見(차수비단발령상소견)이라도 : 이것은 비록 단발령 위에서 직접 본 것이 아니더라도
世無眞見楓岳者(세무진견풍악자)이면 : 세상에 진짜 풍악산을 본 자가 없다면
則可謂推以善知識(칙가위추이선지식)이니라. : 가히 선지식으로 추대할 만하다.
張谿谷是也(장계곡시야)니라. : 장계곡, 장유가 이런 사람이다.
백태명 울산학음모임 성독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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