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11일(현지시간) 찾은 영국 글래스고의 해양명문 스트라스클라이드대학의 한 연구 시설. 5000㎡ 규모의 시설엔 별도의 방이나 칸막이가 존재하지 않는다. 초대형 창고를 방불케 한 모습의 이곳은 미래 해양산업 신기술이 태동하고 있는 국립 스코틀랜드 혁신 제조시설(NMIS)이다. 입구로 들어서니 큰 테이블엔 3D 프린팅 기술로 만들어낸 시제품이 쌓여있고, 다른 한편엔 학생 연구원들이 자동화 로봇을 조립하는 데 열심이었다. NMIS 관계자는 이곳을 "디지털 공장"이라고 소개했다.
이곳에 있는 모든 것들이 미래 조선·해양 산업을 이끌 핵심 기술들이다. 3D 프린팅의 경우 바다에 나간 배 안에서 부품이 파손되거나 고장 났을 때 즉석에서 만들어 낼 수 있다. 대형 협동 로봇은 선박 건조 과정을 자동화하고, 영국에서 부족한 용접공을 대체하는 데 사용된다. 이 밖에도 연비를 향상할 수 있는 선박 경량화 디자인, 선박 자율주행 프로그램 연구가 한 곳에서 이뤄지고 있다.
NMIS 관계자는 "지금 당장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우리는 가능성을 넓히고 있는 것"이라며 "이런 일은 민간이 하는 것보단 국가 자산으로 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말했다.
정부·EU 지원 업고 훨훨

미래 해양산업에선 전문인력 양성이 핵심이다. 해양 분야에선 유럽 최고 명문으로 꼽히는 스트라스클라이드대에는 NMIS를 비롯한 연구센터가 50곳이 넘는다. 전력망 연구센터(PNDC)부터 해양 로봇 연구소, 소형 선박 연구까지 분야를 총망라한다.
이들은 주로 지역의 중소 기술기업들과 협력하고 있다. 정병욱 조선해양공학과(NAOME) 교수는 "대기업 위주인 국내에선 이 같은 산학협력 사례를 찾기 어렵다"고 말했다. 대신 연구 비용은 정부가 댄다. 스트라스클라이드대 조선해양공학과의 총 연구 예산은 약 1000만파운드(약 189억원)인데, 이중 영국연구위원회를 비롯해 공공 비중이 약 60%에 달한다.
스트라스클라이드대는 유럽연합(EU)이 주도하는 세계 최대 연구혁신 프로그램인 '호라이즌 유럽'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기후위기 등에 대응한 연구개발에 EU가 2027년까지 955억 유로(약 150조원)를 지원하는 사업이다. 영국은 EU 탈퇴 이후 준회원국 자격으로 참여 중인데, 한국도 올해 준회원국으로 가입해 연구자금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에반겔로스 불루구리스 조선해양공학과 학과장은 "영국 기관 중에선 가장 성공적으로 호라이즌 유럽에서 7개의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다"며 "2020~2021년 동안 영국에 할당된 1250만파운드(약 236억원) 중 325만파운드(약 61억원)를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英 조선해양공학과 인기, 왜

우수 인재들이 의대로 향하는 국내와 달리 영국에선 공학 관련 전공이 인기라고 한다. 불루구리스 학과장은 "학업 성적도 우수해야 하지만 관련 분야 경험이 있는지를 고려해 입학생을 선발한다"고 설명했다.
국내 대학 및 기업 출신인 10여명도 이곳에서 유학하고 있다. 양인준 박사후연구원은 "연구의 자유도가 높고 실패하더라도 개선점을 찾는 등 성과보단 과정을 중시하는 분위기라 학생들도 만족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스트라스클라이드대를 찾은 국내 조선·해운업계 관계자들의 관심도 뜨거웠다. 한 관계자는 "저출산과 인건비 상승 등의 문제로 한국도 기술 초격차를 확보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며 "국내에선 한번 실패하면 다시 도전하기 어려운 분위기가 있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