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두 울산예총 고문(시인, 소설가)의 1980년 삼청교육대 수난기(受難記)를 연재한다. 울산MBC 기자였던 최종두 고문은 1980년 경기도 포천에 있는 군부대에 끌려가 필설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연재 글에는 인권을 짓밟는 ‘삼청교육’의 참상이 생생히 그려져 있고, 1970~80년대 울산의 정치, 경제, 언론, 문화계 비사(祕史)도 엿볼 수 있다. 최 고문은 “1980년대는 찬탈한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영혼을 뭉개버리는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고, 전주 같은 목봉을 힘겹게 들게 하면서 서막을 열었다”며 “몽둥이와 총으로 지레 겁을 주며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가를 실험한 것이 제5공화국의 주구들”이라고 술회했다. <편집자 주>
세이산방(洗耳山房), 동양화가 우현(牛玄) 화백이 방문했을 때 지어 준 당호였다. 들어가 벌렁 누워버렸다. 어이없는 누명이었어도 그 누명의 죗값을 떳떳이 치르고 온 내가 이제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세상번뇌와 허접스런 소리를 들어도 귀를 씻어버릴 수 있는 이 방에서 나는 <참으며 용서하며>란 에세이집을 썼다. 이렇게 글을 쓰면서 흙과 더불어 자신을 자정(自靜)하면서 모두 잊으며 살리라 하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일본에서 나의 가슴을 흔들어 놓던 고려산과 그곳에서 만났던 그 한민족의 후예인 노인이 떠오르고 울산인수부라 적힌 그 박물관의 분청자기 한 점이 아른거리는 것이었다. 도자기의 세계에서는 무슨 마력 같은 것이 있어서 일단 눈을 뜨기 시작하면 자신도 모르게 빠져들기 마련이다. 분주한 일과 속에서도 틈을 내며 나는 마치 신들린 사람처럼 전국의 유명한 요(窯)를 찾아 헤매는 광이 되고 말았다.
무엇보다 정신에 안정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잠잠한 마음은 자신의 성장에 촉진제가 되는 법이다. 원효(元曉)는 인간이 완전한 덕을 쌓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의 길을 닦아야 한다고 했다. 베풀어 주면서 윤리를 지키며 참고 용서하면서 부지런히 힘쓰고 나아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깊이를 보는 일. 그렇다. 참고 용서하면서 부지런히 힘쓰며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이 내가 취해야 할 자세임을 잠시도 잊지 않으면서 장작을 패서 말리고 밤을 새워 불을 지폈다.
섭씨 천삼백 도에 이르는 가마 속의 불꽃에다 나의 가슴에 쌓인 응어리를 태우고 또 태웠다. 절망감을 가질 새가 없었다. 물레를 돌리고 불을 지피면 마음의 상처와 외모로 나타난 상처도 함께 아물어 갔다. 어느새 나는 도예가로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다.
부산일보사의 후원으로 부산에 나가 전시회도 열었고 전국 공예품 경진대회에 출품했던 두 작품이 모두 입상하는 영광도 얻었다. 도자기로 식탁 종을 만들었던 작품이 특선을 차지했고 그 밖의 한 작품은 입선을 하게 되었다.
일본의 화가 히라노 선생 내외가 찾아와 원한다면 일본에서 자완 전시회를 갖도록 주선하겠다고 했다. 인간문화재 이인호 선생과 안비치 선생도 작업장을 찾아와 멋진 민요 가락을 뽑으며 쉬었다 가셨다. 지홍 박봉수 화백, 우현 송영방 화백, 또 서경보 큰스님도 잠시 쉬어가곤 하셨다. 그러고 보면 그토록 열망하던 회사로의 복귀를 잊은 채 한곳으로 매달리며 편안히 지날 수 있었던 기간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평화를 가져다주는가를 실감하는 생각으로 나도 놀랄 뿐이었다.
아침부터 소리 없이 가랑비가 내리는 어느 날이었다. 작업실 앞에서 인기척이 들려 문을 열었더니 우산 하나에 두 사람이 들고는 서성대고 있었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사람인 것 같은데 도무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최종두 씨입니까?” “예… 그렇습니다만…” 금방 다가서며 손을 잡는 그를 다시 보았다. 전혀 기억이 없이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 최 선생이 맞군요!” “그런데 누구신지요?” 내가 다시 물었으나 그는 여전히 통성명을 하지 않았다. “최 형! 나를 몰라보시는군요!” 그는 자신을 밝히는 것을 망설이는 것 같았다. 그는 같이 온 여자를 저만큼 떨어져 있도록 하고나서 다시 말했다. “최 형이 나를 못 알아보시니…” “나는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좌우간 들어가시지요.”
그를 작업실로 들이고는 의자에 앉도록 했다. 얼굴에 핏기가 말라 병색이 완연한 그가 담배를 권했다. “예, 나는 담배를 못 피웁니다.” 그는 또 머쓱해 하면서 어렵사리 말했다. “최 형! 내가 김00입니다. 보안대에 있던…” 보안대란 소리에 나는 또다시 그를 쳐다보았다. 작업실의 전등을 켜고 나서 한 번 더 쳐다보았다. 희멀게진 눈빛에 병색이 얼굴을 덮어버린 그가 그제서야 보안대의 그 중사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를 알아채고 나서도 우정 다시 확인하고 싶었다. “보안대에 계셨으면 경찰서 연무장에서 만났던 그 분이란 말입니까?” “맞습니다. 김00!”
그는 그때의 그 모습이라고는 한 군데도 찾아볼 수 없는 딴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어디 몸이 불편하십니까?” “예, 내가 큰 병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제대도 하고…” “그렇습니까?” 나는 비로소 그의 근황을 알았으나 어쩐지 선뜻 반가운 기색을 보이지 못했다.
“그런데 왜 나를 찾아오셨습니까? 보시다시피 이렇게 아직도 그린벨트에서 도자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나는 약간의 반항심이 깔린 말로 대꾸해 버렸다. “아닙니다. 최 형!” “그럼 다시 나에 대해서 알아볼 게 있다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최 형! 그것은 절대 아닙니다. 나는 이미 그 옷을 벗은 사람입니다. 최 형이 교육을 가고 나서 잠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나의 순간적인 실수로 빚어진 것을 사과하러 온 것뿐입니다. 최 형… 내 인생을 통해서 그만큼 후회해 본 것이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최 형의 섭섭한 마음을 풀어드릴 수 있겠습니까? 죄송하고 미안합니다.” “김 선생님! 나에게는 이미 섭섭한 게 없습니다.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런데 나를 이렇게 찾아 주시니 고마울 뿐입니다.” “최 형… 정말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더군다나 시한부 인생이라 그 죗값을 갚지 못하고 갈 것 같아서 더 가슴이 무너지는 느낌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의 어느 한군데에서도 힘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막을 수 없는 인생무상의 늪에 빠진 그는 순화교육의 심사를 끝내고 나서 보안대로 오기 전의 부대로 원대 복귀되었고 그렇게 원소속 부대로 가고 나서 바로 전역원을 내고 군복을 벗게 되었다. 그 후 한 달이 못 되어서 검진 결과 간암 판정을 받게 되었다고 했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그에게 내가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으랴. 그가 불쌍해 보였다. 그런 그가 나에게 확답을 받고 가야 할 말이 있다고 했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나와 회사의 전무님 셋이서 점심 약속을 하자는 것이었다. 다음 날 점심으로 개장국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그에게는 이승에서 마지막 약속이 될지 모르는 그 약속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꺼져가는 그의 생명을 잠시라도 연장하기 위해서 약으로 먹어야 한다는 보신탕이 아닌가?
나는 약속 장소를 찾아가겠노라고 대답했다. 그는 몇 번이나 손을 잡으며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고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의 풀죽은 뒷모습이 너무 처량해 보여 눈을 감아버렸다. 그에게도 다 잊어버리고 일어설 수 있는 기적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만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가 저주스러웠던 그에게 이승에서 해주어야 할 말을 한 것이 가슴에 후련함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다 해버린 뒤였다.
‘나는 이미 다 잊어버린 일이라고 하는 말 외에 용서를 구하고 사과하는 그에게 더 해야 할 말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도 인생을 통틀어 가장 많은 후회를 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가 내일 같이 하자던 점심의 메뉴가 보신탕이어야 한다는 것이 어떤지 마음에 걸리는 것 같았다. 그것은 그가 억지로 밀어 넣으면서 가야 했던 교육대에서 죽으라고 곤봉을 맞고 비명을 지르던 일이 몽둥이에 얻어맞아 죽고는 솥뚜껑을 닫은 채 장작불에 고와지는 개들의 신세로 투영되어 오는 것이었다.
최종두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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