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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발흥은 8년 만에 다시 조성된 탄핵정국의 ‘특질’로 주목해야 할 현상이다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를 보듬고 시대를 넘어설 용기와 지혜를 북돋아야 한다
“문재인은 악마예요.” 한 장년층 여성 수강생이 문재인 정권의 실정 사례를 들어달라는 내 질문에 답하기 위해 잠시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곧 비명에 가까운 소리로 그리 답했다. 그에게 문재인 정권은 구체적인 실책을 비판하며 정정을 요구할 대상이 아니라, 저주해야 할 존재였다.
문재인 정권 출범 직후 경기도의 한 공공도서관에서 지역 주민 대상으로 ‘정치 특강’을 하는 자리에서 겪었던 일이다. 보통 공공도서관에서는 정치 관련 강좌는 개설하지 않는다. 정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워낙 뿌리 깊어 정치를 공부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칫하면 편향성 시비가 불거질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 정치의 현실과 관련해서는 더욱더 그렇다. 그래서 여러 차례 지자체와 대학 협동 과정으로 강의를 맡아 할 때, 한국 정치의 현실보다는 주로 외국의 역사적 경험에 바탕해 민주주의 원론에 가까운 내용을 정치 영화나 드라마 등을 활용하며 다루었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 탄핵과 새로운 정권의 등장으로 정치에 대한 관심이 커졌는지, 일회성 특강으로나마 한국 정치 현실에 대한 강의 요청이 빈번하게 들어왔다. 그래서 맡아 한 강의였는데, 그런 일을 겪을 줄은 미처 몰랐다.
그날 강의의 실제 수강생은 오히려 강사인 나였다. 촛불혁명이 탄생시켜 높은 정당성을 자처했던 문재인 정권에 대해 강고한 적대감을 보유한 사람들의 외침을 접했기에. 그것도 배움과 사회경제적 자원이 꽤 풍부해 아쉬울 것 없이 고운 노년을 맞이해 갈 여성에게서.
누군가를 악마로 몰아 저주하는 건, 그 누군가와의 공존과 상생을 거부하고 그를 기어코 ‘배제-추방-절멸’시키겠다는 의지의 피력과 행동의 개시이다. 이는 민주-공화의 규범과 질서에 반하는 정도가 도를 넘어선 행태이다. 작금의 탄핵정국에서 극단, 특히 ‘극우’로 불리는 세력의 등장은 그런 의지에 기댄 혹은 그런 의지를 키워가는 집단이 조직화되었음을 가리킨다. 이런 세력의 등장을 우려하는 이유는 보통사람들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폭력을 조장·동반하기 때문이다. 그런 폭력의 최고 형태가 바로 테러와 전쟁이다.
내가 만났던 그 여성이 극단 세력의 일원인지는 알 길이 없다. 강의 때 만난 그 후로 그를 본 적도 없고 소식을 들을 일도 없다. 지금은 저주를 멈추고 안락하고 평온한 노년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꼭 그가 아니어도 이재명 더불어민주당을 비롯한 야당 정치 세력에 대해서는 물론, 윤석열 대통령 탄핵에 찬성하는 시민마저 악마로 몰아 저주하는 이들을 거리와 광장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요즘이다. 그래서 내 주변의 꽤 많은 이들이 극우 준동을 넘어서서 ‘발흥의 시대’에 들어서 있는 것 아니냐며 근심한다. 그 와중에 극우 파시즘에 대한 공부를 시작했다는 이를 만나기도 하고, 한국의 정치·사회 현실을 히틀러의 나치가 지배했던 시기의 독일과 유럽에 비견하는 분석과 해석을 내놓은 이를 만나기도 한다. 또 최근의 미국과 유럽 주요 국가에서 극우 정당들이 득세한 선거 결과를 보며 극우 발흥이 세계의 공통적 현상이라는 데에 주목하는 이를 만나기도 한다. 한국에서 극우의 깊은 연원과 발흥 배경을 정치·경제, 종교·문화 등 다양한 측면에서 찾는 이를 만나기도 한다. 극우 발흥의 시대에 걸맞은 ‘극우학(혹은 극우사회/정치론)’을 조성하는 지식 담론 지형이 만들어지고 있는 때이기도 한 것이다.
극우 준동 넘어 ‘발흥의 시대’로
극우의 발흥은 8년 만에 다시 조성된 이번 탄핵정국의 ‘특질’로 주목해야 할 현상임이 분명하다. 학문적 조명도 필요하고, 정치적·사회운동적 대응 전략 모색도 필요하다. 그 두 가지의 연결도 필요하다. 그런데 이때 유의하고 전제할 게 있다. ‘의지적 낙관주의’로 현실을 타개하며 오히려 지금보다 나은 미래를 만들기 위한 사항들이다.
첫째, 극우를 단지 악마로 바라보며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으로만 규정해서는 극우의 발흥과 위험성을 제어하고 해소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민주공화제의 규범과 질서를 위협한다고 해도, 그들은 그 규범과 질서의 밖에서 침탈해 들어온 이들이 아니다. 즉 그들은 우리가 결함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주공화제라고 부른 규범과 질서의 작동 구조 안에서 형성되고 등장했다. 암적인 존재이겠으나 어느 날 갑자기 지옥에서 솟아올라온 악마는 아닌 것이다. “문재인은 악마예요”라는 비명 소리는 귀청을 찢기는 했어도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지도, 마음을 사지도 못했다. 법원 침탈과 여의도와 광화문의 “윤석열 탄핵 반대” 고함은 세상에 놀람과 충격을 선사할 수는 있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적어도 아직은 그렇다. 암은 다스림의 대상이기에 초연함을 유지하며 냉철하게 대해야 한다. 암적 존재임을 넘어선 악마라 해도 두려움과 공포가 아닌 극복의 대상으로 보며 넘어설 방법을 찾는 논의와 실천에 집중해야 한다. 극우의 악마적 무서움보다 취약함을 찾아야 한다.
둘째, 극우 발흥 시대의 극복을 위해서는 압도적 다수 시민의 동의와 협동에 기반한 힘을 갖춰야 한다. 그래서 단기적 관점에 기댄 특정 정치 세력의 선택에 앞서 민주공화제의 원활한 작동과 유지의 명분과 실리를 세워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의 좋음을 증명해야 한다. 특정 정치 세력을 선택한다고 해도 이를 제대로 수행할 의지와 역량을 가진 이들이어야 한다. 극우의 취약함은 많은 이들이 민주공화제의 좋음을 이미 알고 있으며, 그 좋음을 구현하고 지키기 위해 두려움과 공포를 이겨내고 저항할 수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데 있다. 폭력의 세기가 강해지면 그 저항의 세기가 결국 커진다는 것도 모른다. 극우는 광주항쟁 때 시민군이 만들어졌던 것, 12·3 사태 때 군대에 맞서 국회를 지키러 시민들이 달려갔던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해방 투쟁 혹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불렸던 저항이 특정 이념과 정치 세력에 대한 지지를 위해서가 아니었다는 것도 모른다. 저항은 사랑하는 사람과의 행복한 삶의 추구를 보장하는 민주공화제를 세우기 위한 것이었기에 다수의 동의와 협동을 끌어내는 초극의 힘을 가졌다는 걸 모르는 것도 극우의 취약함이다. 극우가 아닌 이들도 이를 잊고 있다면 얼른 상기하고 오랫동안 기억해야 하리라.
‘무지의 오판’에 조롱·비난 말아야
셋째, 극우의 민주공화제를 향한 시민의 존재와 의지의 발현에 대한 무지를 조롱의 소재와 비난의 무기로 삼지 말아야 한다. 조롱과 비난은 반발감과 적대감으로 취약함을 오히려 강점으로 만들어 주는 치명적 실책이다. 그들 스스로 무지에 따른 오판임을 체험해야만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야 자신의 무지가 누군가에 대한 미움과 혐오를 우선하다가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의도적으로 조장된 것이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또 자기 삶의 불투명함과 망가짐과 공허함을 좌파라고 딱지 찍은 이들에 대한 헛된 미움과 혐오를 통해 해소하려는 초라함의 귀결이었음을 자각할 수 있다. 부정선거론의 수용과 비상계엄의 정당화 그리고 탄핵 반대 같은 정치적 인식과 태도에 대해서는 비판해야 하고 책임을 물어야 한다. 하지만 분단-전쟁-산업화-민주화-양극화를 거치며 만들어져 온 삶의 서사와 자기연민을 조롱하고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귀 기울여 듣고 눈길을 던져 살펴봐야 한다. 그래야 서로를 악마화하지도, 저주하지도 않을 대안적 서사의 구성이 가능해진다. 극우 독재를 낳은 분단체제라는 미로에서 빠져나올 통합의 서사를 구성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 한정된 지식에 기대어 극우 개념을 남용하거나 누군가를 쉽사리 극우로 몰아가는 것도 삼가야 한다.
이 세 가지를 전제로 삼아 이재명 대표가 주창하고 나선 ‘중도보수론’을 보자면, 그건 단지 선거전략의 차원이 아닌 극우 발흥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한 것으로 심화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정략적 포석과 정책적 의제의 선점만이 아니라 사람들에 대한 존중과 애정이 깊이 배어 있게 만들어가야 한다. 우측으로 가 멈춘 상태에서 멀리 떨어져 나간 이들을 극우라고 명명해 고립시키려는 담론의 효과는 이미 제한적이다. 좌우만이 아니라 ‘상하’로도 움직이며 다양한 처지의 사람들 삶 속에 깃들어 있는 기구한 사연들을 끌어내고 묶어내는 것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재명 대표는 그래야 ‘진심을 알 수 없는 기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넘어설 수도 있다. 더 나아가서는 헌정체제의 울타리를 단단히 하고 그 내부 공간을 넓힐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온기를 높일 수도 있다. 즉 민주공화제를 지켜낼 사회적 약속의 강건함을 키울 수 있다. 비단 이재명 대표와 민주당이 아니어도 국민을 대표해 국정을 책임지려는 정치 세력이라면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극우 발흥의 시대를 넘어서기 위한 담론 정치는 공포를 조장하고 적대성을 가증시키거나 지지 확장을 위한 정략에 머물면 안 된다. 사람들의 고통과 상처를 보듬고 시대를 넘어설 용기와 지혜를 북돋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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