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행복기금 등 채무조정 제도 시행
부실채권 소각·연체자 구제 취지 불구
지급명령신청으로 시효 늘리기 꼼수
과도한 추심 장기연체 고착화 비판에
연장 1회로 제한… 예외 땐 2차 연장
“무분별 관행 막고 회생 취지 살려야”
한국자산관리공사(캠코)가 장기 연체자 채무조정사업을 관리하며 소멸시효 연장을 위한 법원 청구를 170만건 넘게 해온 것으로 확인됐다. 장기 연체자를 구제한다는 취지에 무색하게 독촉절차를 통해 채권소멸 시효를 10년씩 더 늘려 ‘20년 빚쟁이’를 ‘30년 빚쟁이’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재명정부 들어 취약계층 빚 탕감을 위한 새도약기금이 본격 출범한 가운데 무분별한 시효 연장 관행을 막고 회생을 목적으로 하는 제도 취지를 살려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16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사회민주당 한창민 의원실이 캠코로부터 받은 자료에 따르면, 캠코는 채무조정제도인 한마음금융·희망모아·국민행복기금 사업 시행 이후 채무자 140만426명을 상대로 172만건이 넘는 채권 소멸시효 연장 조치를 한 것으로 파악됐다. 법원이 변제를 명령하도록 하는 지급명령신청이나 채권확인 소송을 제기해 소멸시효를 연장해 온 것이다. 캠코가 청구한 채권액은 총 25조5295억원에 달한다.
채무조정제도는 ‘배드뱅크’라 불리는 기금이 오랜 기간 빚을 갚지 못해 생긴 부실 채권을 사들여 소각하거나 채무조정을 돕는 제도다. 돈을 갚을 여력이 없는 채무자의 재기를 돕기 위한 취지다. 2003년 카드사태를 계기로 한마음금융이 출범했고 이후 유사한 역할을 하는 희망모아, 국민행복기금 등이 운영됐다. 이재명정부가 이달에 출범시킨 새도약기금이 계획한 탕감 규모는 역대 최다인 16조4000억원에 달한다. 이 과정에서 캠코는 부실채권 매입과 채무를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
캠코는 이렇게 매입한 채권의 시효 만료를 막기 위해 법원에 독촉절차인 지급명령신청을 하거나 채무자를 상대로 채권확인 소송을 제기한다. 통상 금융채권은 5년 안팎의 시효가 적용되는데 이런 소송을 거치면 기한이 10년씩 늘어난다. 캠코 내부 규정을 보면 시효가 임박한 채권은 ‘기본 시효관리조치’ 대상이 돼 법원에 시효 연장을 청구한다. 이후에도 해소되지 않은 채권에 대해선 ‘연장 시효관리조치’ 기한을 10년 더 늘린다.
캠코는 사업 관리 차원에서 채권의 시효 연장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결과적으론 과도한 추심으로 장기 연체가 고착화하는 등 채무조정제도 취지가 무색하다는 비판이 나오고 있다. 실제 캠코가 2차 연장 조치를 한 채권의 평균 연체 기간은 지난해와 올해 상반기 각각 22.0년이다. 20년이 넘는 연체 기간에 10년이 추가로 연장되는 거다. 연체 기간이 30년 이상 40년 미만인 초장기 채권도 2022년과 2023년 각각 1건이던 것이 지난해 6건, 올해 상반기엔 7건으로 늘었다.

정부도 이런 문제를 인지하고 있다. 금융위원회는 최근 민간 금융권의 무분별한 시효 연장 등을 통한 ‘시효 부활’ 관행을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작 정부 주도의 배드뱅크 사업에선 시효 연장이 반복된다는 비판이 일자 캠코도 채권 연장 횟수를 1회로 제한하기로 했다. 연장을 기본값으로 하던 현행 규정을 고쳐 내년부턴 예외적인 경우에만 2차 연장을 하겠다는 것이다. 캠코 관계자는 “과도한 시효연장·추심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커졌고, 공공부문부터 (채무조정제도를) 회생 중심으로 전환하라는 요구가 높다”고 개정 배경을 설명했다.
국회에서도 보완 입법이 추진되고 있다. 한 의원은 소멸시효가 완성된 개인채무자에게 시효 완성을 통보해 권리행사 기회를 보장하도록 하는 내용의 개인채무자보호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한 의원은 “이재명정부의 새도약기금사업은 ‘추심 대신 회생’ 원칙을 분명히 해야 한다”며 “20년 빚쟁이를 30년 빚쟁이로 만드는 시효연장소송 관행도 중단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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