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색으로 찬란하게 빛난 흑백요리사들

2024-10-12

흑수저·백수저로 계급을 나눴음에도 본인의 길 위에서 최선을 다하는 셰프들

경쟁 프로그램이라기보다 ‘파티’에 가까웠다, 맛이란 무기로 요리를 겨루는

SNS를 두서없이 서핑하다 보면 가끔 질문을 던져보고 싶을 때가 있다. 그래서 즐거우십니까? 혹시 우울하신가요? 이유가 뭔가요? 누군가는 저렇게 화려한데 나는 스마트폰이나 보고 있으니 세상에는 역시 계급이 존재하는 것 같죠? 그걸 실력으로 돌파할 수 있을까요? 둘 중 하나일 수도, 어쩌면 한쪽에 쏠려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몸과 돈이 곧 계급인 요즘 같은 시대, 눈에 보이는 것만이 내 세상이라고 믿고 살다간 일상이 너무 험하게 느껴질 때가 자주 있었다. 모든 게 너무 노골적이라서다. 도무지 이길 수 없는 싸움판 같아서다.

인스타그램을 켜면 멋짐과 질투가 동시에 치고 들어왔다. 유난히 힘든 날 그리스 어딘가의 해변에서 느긋하게 햇볕을 쬐고 있는 누군가의 사진을 봤을 때. 너무 갖고 싶었지만 못 샀던 어떤 물건을 몇개나 사서 쟁여놓는 부자 친구의 피드를 만났을 때도 그랬다. 심지어 켄들 제너가 너무 멋진 옷을 입었을 땐 한국에 사는 40대 빡빡이 남자인 나도 거울 앞에서 질투와 열등감을 느꼈다. 카녜이 웨스트나 메시 같은 슈퍼스타의 피드를 보면서도 선망과 질투가 동시에 생기도록 유도하는 인스타그램의 허황된 힘. 헛되고 헛되지만 감정만은 실존했다.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내가 바로 흙수저였다. 얼마나 더 열심히 해야 할까. 그런 건 열심히 한다고 되는 게 아닌데.

이러니 미성년자 보호기능을 도입하는 건 너무 당연하고 고마운 처사 아닐까. 이제 막 세상을 배워가는 10대들이 스마트폰을 열자마자 느끼는 감정이 시기와 질투와 열등감이라면 세상은 얼마나 더 비극적일까. 인스타그램은 10대 이용자가 팔로하거나 이미 연결된 사람에게만 개인 메시지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부모의 감독 권한도 강화했다. 하루에 60분 이상 인스타그램을 봤을 땐 앱을 종료하라는 알림을 받도록 했다. 성적인 콘텐츠나 자살, 자해에 관한 콘텐츠를 추천하지 않도록 하기도 했다.

미국, 영국, 캐나다, 호주 등 영어권 국가에서 먼저 시행한 정책. 2025년 1월부터는 한국에도 적용할 계획이다. 이거, 성인에게도 적용해주면 안 될까?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이미지의 세상이 이러니 텍스트는 좀 나을까 싶어 스레드(Threads)를 열어도 다르지 않았다. 더 구체적으로 적나라했다. ‘연봉이 얼마고 키가 얼마인데 여자친구를 사귈 수 있을까요?’ ‘연봉 3억에 키 170, 연봉 8천에 키 180. 둘 중 누구를 만나야 할까요?’ 돈과 몸과 자동차와 아파트가 참 가파른 계급사회를 보여주며 급을 가른다 믿는 사람들 사이, ‘근데 데이트 상대를 왜 그런 걸로 정해요?’ 묻고 싶어지는 마음조차 좀 어눌하고 순진해 보였달까.

신분제는 사라지지 않았나. 계급이고 뭐고 다 떠나서 그냥 나 자신으로 제각각 존재할 수는 없을까. 이런 나라에서 <오징어 게임>이 나온 게 우연일까. 돈이 없는 사람들은 없어서 목숨을 걸고, 돈이 너무 많은 사람은 무료해서 사람을 서바이벌 게임의 말 정도로 여기는 게임. 그게 한국 사회의 축소판이라는 해석은 너무 진짜라서 게으르지만, 같은 드라마가 전 세계를 강타했을 때는 또 다른 차원의 씁쓸함이 있었다. 한국만의 현실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곧 공개하는 <오징어 게임 2>에는 좀 다른 세상이 담겨 있을까.

흑과 백이 아무리 블랙(black)과 화이트(white)라 우긴들 그저 재치 있는 기획이고 작명일 뿐, <흑백요리사>야말로 노골적인 계급투쟁으로 읽힐 가능성이 농후했다. 백수저로 시작해 최종 8인 안에 든 셰프들에게는 이미 대단한 경력과 스토리와 레스토랑이 있었다. 미국의 역대급 요리 서바이벌 게임에서 우승했던 에드워드 리, 다른 요리 프로그램이었다면 심사위원으로 나왔을 최현석 셰프, 이미 몇개의 레스토랑을 운영 중인 장호준 셰프, 딤섬 여왕 정지선 셰프의 실력에는 제각각 의심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의 흑수저들이 마냥 다 흙수저였을까?

최종 8인 중 4명에 든 흑수저들은 백수저 셰프들과 같은 무기를 들고 있었다. 경력과 실력과 레스토랑이 있었다는 뜻이다. 트리플스타 강승원 셰프에게는 ‘트리드’, 요리하는 돌아이 윤남노 셰프에게는 ‘디핀’이 있다. 이모카세 1호 김미령 셰프에게도, 나폴리 맛피아 권성준 셰프에게도 각자의 업장이 있다. 그들이 만든 무대에서 그들의 무기로 싸우는 전사들. 그들을 보면서 몇년 전 태안에서 먹었던 간장게장 한 상이 떠오른 이유이기도 했다.

유명한 집이었다. 너무 맛있어서 가끔 택배로 주문해 먹기도 하는 식당이었다. 그날은 마침 태안에서 촬영이 있던 날이라 부러 그 집을 찾았다. 여전한 맛에 감탄하고 감동하면서 두 번째 공깃밥을 주문하는데 저 안에 있는 방에서 식사를 마친 손님들이 일어나면서 가게가 부산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사장님 한번 얼굴 뵙고 싶다고 우리 ○○○님께서.”

“아, 싫어요. 없다고 그래.”

“어떻게 그래요. 한번만 도와줘.”

“없어, 아유 싫어. 없다고 그래. 그냥 죽었다 캬.”

그 지역의 꽤 높은 공무원이 수행원들과 함께 식사를 나온 것이었다. 사장님은 주방에 앉아 있었는데, 군수인지 구청장인지 아무리 높은 사람이 와도 일어나 얼굴을 뵐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수행원은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돌아섰고 식당은 다시 고요해졌다. ‘돈을 낸다고 다 갑이 되는 건 아니야. 이렇게 맛있는 간장게장을 만드는 어르신이 뭐가 부족해서 보잔다는 관리한테 얼굴을 비추겠어?’ 나는 두 번째 공깃밥을 남은 간장게장에 비벼 김에 싸 먹으면서 생각했다. 그 간장게장집은 사장님이 평생 일군 맛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 나라 손님들은 음식 앞에서 계급이 없었다. 맛있게 먹고 고르게 배가 불러 행복하게 떠났다.

지금까지의 서바이벌 게임들이 합격과 불합격으로 계급을 나눈 후 궁극적으로는 삶과 죽음에 가깝게 다뤘다면, <흑백요리사>에는 그런 스펙터클이 없었다. 오히려 출연자 모두에게 간장게장집 사장님 같은 포부가 있었다. 아무도 다른 누구에게 꿀리지 않았다. 그래서 편안했고 오히려 파티에 가까웠다. 평소에는 만날 수 없는 셰프들끼리 각자 최선을 다해 요리를 겨루는 파티. 각자의 길 위에서 떳떳한 직업인들이 승패를 떠나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열두 편의 이야기.

“심사위원에게 가는 길은 멀었어요. 가끔은 ‘잠깐만, 돌아가서 뭔가 고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하지만 한번 걷기 시작하면 끝까지 걸어야 하죠. 한번 해봅시다.”

<흑백요리사> 10화, ‘인생을 담은 요리’에서 현대식 참치 캐비아 비빔밥을 선보인 에드워드 리 셰프는 이렇게 말했다. 흑과 백으로 나누고, 장르와 스타일이 다름을 강조하고, 심지어 흑수저로 분류된 셰프들에게는 마지막까지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지만 <흑백요리사>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서바이벌 게임의 공식을 비틀었다. <흑백요리사>의 셰프들은 모두 각각의 길 위에 있었다. 누군가는 오래 걸었고, 그러다 조명을 받기도 했고, 다른 누군가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었다. 참 많은 것들이 달랐지만 근본이 같았던 직업인들. 근본이 같으니까 정당하게 겨룰 수 있었다. 져도 후회가 없었다. 서로를 존중할 수 있었다.

아무리 멀어도, 돌아가서 고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도 각자의 길 위에 서 있을 뿐이라는 진실. 참 모질고 힘들기만 한 것 같은 현실에서도 가끔은 파티가 열린다는 사실. 세상이 어떻게 그렇게 치열하고 가차 없기만 할까. 최선을 다해 실력을 갖추려는 사람들은 어디서도 꿀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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