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 36억 달러 투입한 남미 최대 항구 페루 창카이항 개항
브라질과 에콰도로, 칠레, 콜롬비아 등 남미 수출관문 역할
실질적 운영자, 지분 60% 보유한 국유기업 중국 원양해운
단순히 무역항에 그치지 않고 美 군사시설 정탐 활동 우려
수도 리마에서 북쪽으로 80㎞쯤 떨어진 페루 서쪽의 창카이항. 이곳에서 중국이 5년 간의 건설공사 끝내고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맞춰 지난 14일 화려한 개항식이 열렸다. 붉은 용이 꿈틀대는 용춤이 펼쳐지며 개항식 행사장은 마치 중국 전통축제를 보는 듯했다.
APEC 정상회의차 리마를 방문한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이날 디나 볼루아르테 페루 대통령과 함께 화상으로 참석한 개항식에서 “중국과 라틴아메리카 사이에 창카이항을 출발점으로 하는 새로운 육상회랑을 건설할 준비가 돼 있다”며 ‘경제영토’ 확대 의지를 야심차게 밝혔다. 중국이 인도·태평양전략으로 중국을 포위하고 있는 미국의 견제를 뚫고 남미 진출의 교두보 마련을 공식 선포한 셈이다.
창카이항은 중국이 ‘일대일로’(一带一路·Belt and Road Initiative·BRI, 중국~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는 육상·해상 실크로드)사업 자금 36억 달러(약 5조원)를 쏟아부어 건설했다. 국유 해운기업인 중국원양해운(遠洋海運·COSCO Shipping)이 60%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등 중국이 실질적 운영을 맡는다. 상황이 이런 만큼 창카이항엔 중국산 무인 크레인들이 부두에 줄을 섰고, 중국 전기차 업체인 비야디(比亞迪·BYD)의 픽업 트럭이 운행 준비를 마쳤으며, 건설 작업 자동화를 담당할 중국 통신장비업체 화웨이(華爲)가 세운 인터넷 타워가 들어섰다.
미국이 중남미 국가들을 뒷전으로 미뤄둔 사이 중국의 입김이 세졌다고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5일 보도했다. 미국의 무관심을 틈타 중국이 중남미와 결속을 강화함으로써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 질서와의 결별을 촉진해 중남미는 더 이상 미국의 뒷마당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국은 2015년까지만 해도 페루의 최대 무역국이었다. 이후 도널드 트럼프 1기와 조 바이든 미 행정부를 거치면서 중국의 교역량이 급증하며 페루에서 미국과 중국의 무역량 격차는 점차 커졌다. 지난해 기준 두 나라의 교역량 격차는 163억 달러까지 벌어졌다.
페루뿐만이 아니다. 중국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칠레, 파라과이 등 중남미 국가와 경제적 연계를 강화하는 데 공들이고 있다. 미국이 대중남미정책 중점을 불법이민과 마약 억제에 두면서 생긴 경제협력의 공백을 파고들고 있는 것이다.
라이언 버그 미 워싱턴 전략국제연구센터(CSIS) 아메리카 프로그램 책임자는 "중남미는 미 기업들이 원하는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는 데도 (미국은) 답답할 정도로 무관심하다"며 "이제 중남미를 미국의 '뒷마당'으로 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지적했다. 중남미 국가들이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원하지만, 미 정치권이 중남미 지역은 부차적인 순위로 다룬다는 얘기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중남미 국가 중 여전히 미국과 활발하게 교역하는 곳은 멕시코와 콜롬비아 정도다. 2000년엔 미국이 중남미 전체 국가를 대상으로 가장 많이 교역했지만 상황이 빠르게 바뀌었다. 중국이 중남미 지역에 적극 진출하며 원자재 부문에선 아르헨티나 리튬, 베네수엘라 원유, 브라질 철광석과 대두(콩) 구매 시장의 ‘큰손’으로 자리 잡았다.
미 윌리엄앤메리대학의 연구기관인 에이드데이터에 따르면 페루 창카이항, 에콰도르의 수력발전 댐 등을 포함해 중남미의 중국 인프라 건설 프로젝트 규모가 무려 2861억 달러에 이른다. 이 같은 규모는 중국의 아프리카 ‘일대일로’ 프로젝트와 맞먹는 수준이다. 에이드데이터는 "(아프리카에서의 중국 프로젝트보다) 대출 모델이 완화되면서 중남미 지역의 반발도 그만큼 덜하다"고 강조했다.
이에 힘입어 중국은 이미 지난해 기준 남미 최대 경제국 브라질을 비롯해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볼리비아, 페루, 칠레, 파나마, 파라과이의 역외 최대 무역국으로 이름을 올렸다. 중국의 대중남미 교역은 2000년 120억 달러에서 20여년 만인 지난해 기준 4500억 달러로 무려 37.5배나 폭증했다. 로이터통신은 “미국이 지역경제 정책을 새롭고 효과적으로 개선하지 않는다면 중남미 지역은 중국의 이익 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반면 미국은 개발도상국 인프라 구축에 관심이 별로 없다. 트럼프 당선인은 대선 기간 내내 ‘미국 우선주의’를 표방하며 연방정부의 예산을 최소 2조 달러 줄이겠다고 공언했다. 지난해 바이든 대통령이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대응하고자 출범시킨 인도·중동·유럽 경제회랑(IMEEEC) 구상에도 제동이 걸릴 공산이 크다. IMEEEC는 인도와 중동, 유럽을 잇는 철도·항구 등 인프라 연결 프로젝트지만 트럼프 당선인은 남의 나라에 천문학적인 예산을 쏟아부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마이클 시프터 미 싱크탱크 미주간대화(IAD) 선임연구원은 “중남미 국가들은 트럼프 미 대통령 당선인이 새롭게 집권하는 향후 4년간 어떤 일이 발생할지 우려하고 있다”며 “‘트럼프 관세 장벽’이 일부 중남미 국가를 잠재적으로 중국에 더 가깝도록 만들 수 있다”고 우려했다.
페루 창카이항은 모든 용도의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초대형 항구를 뜻하는 ‘메가포트’(megaport)로 건설됐다. 접안 시설을 15곳 갖췄으며 최고 수심은 17.8m에 이르는 등 남미 최대의 심해 항구다. 브라질과 에콰도르, 칠레, 콜롬비아 등의 수출관문으로 활용될 전망이다.
신화통신·CCTV 등 중국 관영 매체들은 창카이항에 대해 “남미 최초의 스마트 항구(주요 기능이 최첨단 기술로 운영되는 항구)로 새로운 허브항이자 태평양 관문이 될 것”이라고 일제히 보도했다.
특히 화웨이와 중싱(中興)통신(ZTE) 등 중국 통신장비 업체들이 중남미 24개국 통신 네트워크 구축 사업에 뛰어든 것을 비롯해 중남미 각국에서 중국 기업들이 도시 철도와 도로 등 건설 사업을 수주하며 영향력을 키웠다. 여기에다 첨단기술로 운용되는 초대형 항만까지 확보하면서 중남미에 대한 영향력이 더욱 세질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미국은 중국의 활발한 중남미 진출 전략을 자국 패권 흔들기로 간주한다. 이 때문에 창카이항을 경계의 눈초리로 지켜보고 있다. 이 항구의 기능이 무역항에 머물지 않고 미국의 군사 시설을 정탐하는 역할도 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한다. 워싱턴포스트(WP)는 “미국은 중국의 창카이항 관여 수준을 볼 때 페루가 중국 군함의 거점이 될 것”이라고 전했다.
더욱이 미국은 창카이항을 실질적으로 운영하게 될 중국원양해운의 전횡을 우려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경제적 필요에 따라 창카이항을 운영하겠다고 하면서도 중국인민해방군의 교두보 기능도 마련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실제로 중국은 ‘일대일로’ 프로젝트 자금을 투입해 스리랑카 함반토타항 건설을 지원한 뒤 스리랑카가 디폴트(채무불이행)를 선언하며 국가부도 사태에 이르자 항만 운영권을 넘겨받아 중국군의 인도양 전진기지 용도로 사용할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있다.
중남미를 관할하는 미군 남부사령부의 로라 리처드슨 사령관은 지난 3월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나와 "창카이항은 미국의 이익에 심각한 위험을 초래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중국이 교역뿐 아니라 군사용으로 이 항구를 활용할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중국의 대규모 자본이 투입돼 건립된 창카이항을 거치는 모든 물품에 대해 미국은 중국산 제품과 마찬가지로 60%의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는 주장이 트럼프 당선인 측에서 제기됐다. 내년 1월 20일 취임을 앞둔 트럼프 당선인도 대선 과정에 모든 중국산 제품에 대해 60%의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트럼프 인수위원회에서 활동 중인 마우리시오 클라버 캐논 전 미주개발은행(IDB) 총재는 페루 창카이항을 통한 물품 유입이 급증할 것을 우려하며 중남미에 있는 중국자본 소유 항구 및 중국이 관리·운영하는 항구를 거치는 모든 물품에 미국은 60%의 관세를 부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럼프 1기에서 중남미 특사도 지낸 그의 이 같은 제안은 환적 문제를 방지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된다. 제3국의 상품이 최종 목적지인 미국에 직수출하는 것보다 중남미로 들어와 낮은 관세 혜택을 받을 수 있는 '환적 문제'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포석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글 /김규환 국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