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가 K방산의 새로운 시장으로 주목받고 있다.
과거에는 비행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수십 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지리적 제약 등으로 K방산에 대한 관심이 낮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세계 곳곳에서 군비 증강 움직임이 거세지면서 중남미에서도 K방산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다.
특히 태평양과 접하고 있는 페루에선 K방산이 성과를 거두고 있다. 장갑차와 군함 납품 계약을 수주하고, 각종 장비 개발과 협력 등에 대한 협약을 체결하는데 성공했다.
일각에선 이같은 성과를 토대로 중남미 시장에서 첨단 무기 수출을 기대하는 기류도 감지된다. 하지만 재정적 여력이 크지 않고 정치적 요인에 의해 전력증강 사업이 영향을 받는 중남미 국가 특성상 한계가 있을 것이라는 우려도 나온다.
◆장갑차·잠수함·전투기 부품까지 협력
지난 15∼16일(현지시간)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열린 페루 리마에서는 한국 방산업계와 페루 측과의 협력 방안이 도출됐다.
페루는 지난 2010년 한국 공군이 쓰다가 퇴역시킨 미국산 A-37B 공격기를 인수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한국항공우주산업(KAI)이 만든 KT-1 훈련기 20대를 구매, 그 중 16대를 현지 생산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APEC 정상회의 기간 한국 방산업계는 페루와 양해각서(MOU) 3건을 체결했다.
현대로템은 페루 육군 조병창(FAME)과 지상 장비 협력 총괄협약서에 서명했다. 총괄협약은 페루 군 무기 획득 절차에서 개별 무기체계에 대한 실행계획에 앞서서 만든 것이다. 협약 부속서에는 대략적인 물량도 언급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로템은 지난 5월 페루 조병창이 발주한 차륜형 장갑차 사업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됐고, 지난달 6000만 달러(810억 원) 규모의 계약을 맺어 중남미 시장에 처음 진출했다.
이에 따라 한국 육군이 쓰는 K808 차륜형장갑차 30대를 페루에 공급한다. 페루 수출형은 한국군과 외관은 차이가 거의 없다.
다만 페루 측의 요구로 지뢰와 급조폭발물 피해를 최소화하고자 차체 하부 방어력이 강화되면서 중량이 20t에서 23t으로 늘었다.
도하작전에서 쓰기 위해 차체 후방에 있었던 워터제트는 제거됐다.
현대로템은 이번 총괄협약을 토대로 K-2 전차와 특수 차량, K808 후속 물량 등의 수출을 위한 실무 협상에 나설 계획이다.
업계에선 K808 후속 물량의 경우 200~300대에 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한국항공우주산업(KAI)도 페루 국영 항공 전문기업인 세만(SEMAN)과 KF-21 부품 현지 공동 생산 협약을 체결했다.
노후 전투기가 다수인 페루는 이를 대체할 사업을 추진하고 있는데, KAI는 KF-21과 FA-50으로 구성된 패키지를 제안하고 있다.
HD현대중공업도 페루 국영 시마(SIMA)조선소와 잠수함 공동 개발을 통한 페루 산업 발전 양해각서를 맺었다.
페루는 209급 잠수함 6척을 보유하고 있는데, 노후화가 진행되면서 신형 잠수함을 확보할 필요가 제기되고 있다.
HD현대중공업은 지난해 시마조선소와 4억6000만 달러(6406억 원)를 들여 호위함 1척, 원해경비함 1척, 상륙함 2척 현지 건조 공동 생산 계약을 맺은 바 있다.
이번에 체결된 협약은 한국의 무기획득체계 절차 중에서 초기 단계에 해당하는 소요제기 수준으로 평가된다.
페루의 방위산업은 장갑차량 유지보수(MRO), 소총과 탄약 생산, 함정 건조에 집중되어 있다.
첨단 기술 수준도 낮으므로 지상장비나 미사일, 전투함 등의 소요는 해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소요를 제기하고 요구성능과 예산을 설정하며, 활용할 기술을 분류하는 등의 작업도 마찬가지다.
페루군이 전력증강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이 필요로 하는 고성능 무기의 종류와 도입 방법, 기술 수준 등을 한국 방위산업계와 함께 분석한다면 시행착오를 줄일 수 있다.
국내 방위산업계도 페루군의 소요를 국산 무기 성능에 가깝게 맞춰서 미국이나 유럽 방산업체의 도전을 저지하는 ‘진입장벽’을 높이는 효과가 있다.
일각에선 실효성 여부를 우려한다. 한국군의 경우 소요제기와 검토 및 확정이 이뤄져도 전력화 단계에 이르는 무기체계는 일부에 불과하다. 전력화까지 소요되는 시간도 상당하다.
페루와 맺은 협약이 발전해서 실제 도입 계약 체결까지 상당한 시간이 걸릴 가능성도 있다. 일부 국산 무기의 경우엔 페루군 도입이 이뤄지지 않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대목이다.
◆무시도, 기대도 쉽지 않은 중남미 시장
중남미 시장은 글로벌 방위산업계에서 큰 주목을 받지 못하는 곳이었다.
중남미는 전면전 위협보다는 범죄 및 반군 소탕과 마약 단속 등의 비중이 높다. 콜롬비아와 더불어 남미의 주요 마약생산국인 페루의 군대는 반군 진압작전과 마약 퇴치, 재난구호, 대테러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다 보니 중남미 국가에선 미사일이나 전자전 장비 등 부가가치가 높은 고가의 첨단 대형 무기 수요가 크지 않다.
국방예산 지출도 미국, 캐나다 등 북미 지역보다 적고 경제력도 매우 낮다. 따라서 방위산업 시장 규모도 작고, 선진국 방산업계의 움직임도 크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동유럽과 중동에서 성과를 거둔 K방산 입장에선 시장 규모는 작지만 글로벌 방위산업체의 활동이 적은 중남미는 노려볼만한 곳이다.
페루와의 협력이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폴란드나 사우디아라비아 수준보단 낮지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는 효과가 있다. KT-1을 수출한 이후 새로운 제품을 지속적으로 공급해 타국 업체가 쉽게 진출하지 못하도록 진입장벽을 쌓는 효과도 있다.
우려도 적지 않다. 중남미 국가들은 국방예산 부족으로 장비를 제때 교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서 노후화가 심하다.
페루군도 정비 문제로 무기 노후화가 심하며 가동률도 낮은 것으로 평가된다. 오래 전에 도입한 무기를 교체하지 못한 채 그대로 쓰고 있다.
일부 현대화 작업이 이뤄지기는 했으나, 군 조직 전반에 걸친 현대화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전력 개선 투자가 미약해 방위산업 역량도 위축된 상태다.
실제로 페루군의 전차는 냉전 시절인 1974년 도입된 옛소련산 T-55, 1956년에 구입한 프랑스산 AMX-13이다. M113을 비롯한 궤도형장갑차도 1970년대 도입됐다.
이를 대체하고자 1990년대부터 페루군은 전차 도입 사업을 추진했다. 신형 전차 70대를 구매해 2~3개 전차대대와 육군기갑학교에서 운용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이를 위해 여러 국가에서 전차 도입을 검토했으나 비용 문제 등으로 이뤄지지 못했다.
중국산 전차 도입은 엔진 부품 문제 등으로 무산됐고, 러시아산 T-90S는 유지보수 및 성능개량비가 너무 비싸다는 판단을 내렸다. 독일, 스페인, 네덜란드에서 중고 전차를 구매하는 것도 거부됐다.
중고 전차도 사들이지 못했던 상황에서 대당 수십억원의 비용이 드는 K-2 전차 구매가 가능할 것인지 회의적인 시선이 제기되는 대목이다.
지난달 K808 차륜형장갑차 도입이 결정됐던 신형 장갑차 사업은 2017년 초 페루 국방부가 구매를 검토한다고 밝혔지만 예산 배정이 이뤄지지 못하면서 지연된 바 있다.
중남미 시장을 노리는 경쟁자들의 존재도 변수다.
방산물자교역지원센터(KODITS)에 따르면, 지난 3월 스페인 방위산업 사절단이 페루를 방문, 국방부와 해군 훈련소 등에서 면담을 진행했다.
사절단에는 군용기 제작사인 에어버스와 에어버스 헬리콥터, 군함을 만드는 조선소인 나반티아 등 다수의 업체가 참가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 막대한 무기를 수출하던 러시아의 활동이 전쟁 직후 크게 위축되면서 다른 나라들이 러시아의 공백을 대체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 것과 무관치 않다는 지적이다.
스페인은 과거 중남미 일대를 식민지배했고, 그 영향으로 중남미에선 스페인어를 많이 쓴다. 다른 나라보다 경쟁 우위가 높은 셈이다.
이스라엘도 페루에서 소총을 생산할 계획을 갖고 있으며, 브라질과는 차륜형 자주포 계약을 맺은 바 있다.
페루와 국내 방위산업체들이 맺은 방산협력 협약은 지속적인 방산수출 확대를 기대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중남미 시장의 특성을 제대로 파악하고 신중하게 움직이지 않는다면, 실효성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눈앞의 성과에만 급급하는 것보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움직이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박수찬 기자 psc@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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