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 들어 자주 눈에 밟히는 단어가 ‘영포티’다. 기존 중년과 달리 유행에 민감하고 젊은 감각을 유지하는 40대를 일컫던 신조어가 언젠가부터 젊어 보이려 애쓰는 ‘꼰대’라는 조롱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그 앞에 달콤하다는 뜻을 가진 영단어 ‘스위트(Sweet)’의 발음을 비꼰 ‘서윗’을 더하면 젊은 여성에게 추파를 던지는 중년 남성을 가리키는 멸칭이 완성된다. 40대 중반 남성인 나로서는 그런 변화가 유쾌하진 않지만, 언어는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라지 않던가. 사회 문제를 주로 다루는 소설가로서 변화가 어디서 비롯됐는지 궁금해졌다.
정치권의 부정적 언급으로 시작
초기엔 긍정적인 이미지로 사용
여야는 지금도 막말로 서로 비난
지지층 결집은 순간, 남는 건 분열

‘영포티’의 멸칭화를 다룬 사후 분석이 많았다. 사회·경제적으로 안정된 ‘영포티’가 비대한 자아를 갖고 있고 자기중심적 소비에만 몰두해서 가진 게 많지 않은 청년 세대의 반감을 사고 있다는 분석이 눈길을 끌었다. 과거 성차별의 수혜는 다 누리고, 이제 와서 여성을 존중하는 척하며 청년 세대를 가르치려 드는 모습이 위선적이어서 반감을 사고 있다는 분석도 보였다. 2030 청년 세대 남성의 보수화 현상이 ‘영포티’ 혐오의 배경에 있다는 분석도 눈에 들어왔다. 유구한 세월에 걸쳐 반복돼 온 세대 갈등의 또 다른 형태일 뿐이라는 분석도 있었다.
모두 나름대로 일리 있는 분석이었다. 다만 신조어치고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꽤 오랫동안 지속해서 사용된 단어가 단기간에 멸칭으로 바뀐 이유를 설명하긴 부족해 보였다. 이 모든 분석을 아우를 수 있는 분석은 없는 걸까. 폭발물은 그저 모아놓았다는 이유로 폭발하진 않는다. 폭발을 유도하는 기폭 장치가 필요하다. 마찬가지로 특정한 현상에는 이를 유발하는 계기가 있기 마련이다. 지난 2017년 미국 뉴욕타임스가 보도한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 제작자 하비 와인스틴의 성추행 기사가 전 세계적인 미투 운동의 기폭 장치로 작용했듯이 말이다.
변화는 어떤 형태로든 기록을 남기고, 기사는 공신력 있는 첫 기록인 경우가 많다. 포털사이트에서 ‘영포티’라는 키워드로 기사를 검색한 뒤 오래된 순으로 정렬해봤다. 2015년 말부터 이 단어를 언급하는 기사가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주로 경제나 문화 분야 기사에서 긍정적인 이미지로 소비되던 단어였다. 2017년과 2018년 사이에 일부 기사가 ‘영포티’를 부정적인 의미로 다뤘다. 중년 남성과 젊은 여성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드라마와 영화를 향한 일각의 반감을 다룬 기사였는데, 보도가 길게 이어지진 않았다. 이후에는 트렌드 기사에서나 종종 언급됐고, 대체로 긍정적인 이미지를 유지했다.
‘영포티’가 부정적인 의미를 넘어 멸칭으로 언급되는 기사 보도가 유의미하게 늘어난 시점은 2024년 초부터였다. 정치권에서 상대방을 공격할 때 이 단어를 사용했음을 보도한 기사가 시작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이 단어를 전면에 내세워 진보 성향인 40대를 비판한 기획 기사 보도도 있었다. 그런 기사에는 어김없이 정치적 성향이 다른 상대방에 혐오를 드러내는 수천 개의 댓글이 달려 있었다. 여러 온라인 커뮤니티로 기사가 공유됐고, 그곳에서도 기사를 두고 댓글로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음은 물론이다.
언어는 현상을 범주화하고 구체화하는 틀을 제공한다. 언어로 정의된 현상은 현실 인식에 도움을 주기도 하지만, 특정 관점을 강화하거나 훼손하기도 한다. 일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혐오의 표현으로 쓰였던 ‘영포티’라는 단어가 정치권의 신중하지 못한 발언이라는 기폭 장치를 통해 폭발하고 이를 언론이 받아서 확산 및 재생산하는 과정을 거쳐 한 세대의 멸칭화로 이어진 게 아닐까. 이런 내 생각이 비약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국민에게 미칠 영향력을 고려했다면 정치권만큼은 함부로 그런 단어를 혐오의 표현으로 쓰지 말았어야 했다.
최근에도 여야 정치권에선 온갖 혐오의 표현이 난무했다. 여당 대표는 “악수는 사람과 하는 것”이라고, 제1야당의 원내대표는 계엄 당시 이재명 대통령과 자신이 죽을 뻔했다는 여당 대표의 국회 발언에 “제발 그리됐으면 좋았을걸”이라고 서로에게 막말했다. 야당 대표는 여당 대표를 향해 ‘정치테러 수괴’, 여당 대표는 야당 대표를 향해 ‘내란수괴 똘마니’라고 부르며 드잡이했다. 혐오의 표현으로 얻는 건 지지층 결집이라는 순간의 결과뿐이고 남는 건 언제 끝날지 모를 국민의 분열이다. 나는 ‘영포티’를 둘러싼 ‘조롱잔치’에서 대한민국의 불안한 미래를 엿봤다.
정진영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