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레퓌스, 진실과 허위의 대결

2025-03-28

[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1991년)과 천안함 사건(2010년), 계엄을 계몽이라 하는 논쟁(2025년). 이 3사건은 어처구니없는--허위(거짓)가 진실을 이겨내려고 하는--내가 경험한 대표적인 싸움이었다.

『드레퓌스』(N.힐라즈. 황의방 옮김. 한길사. 1979.)를 대학 때 읽었다. 책에 덧붙인 제목은 ‘진실과 허위, 그 대결의 역사’다. 이 책이 보여준, 허위와 대결하는 진실의 양심행진이 이보다 더 장엄할 수 없었다. 때문에 내 의식은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하게 되었다.

내 생애에서 의식의 전환을 가져온 또 책 한 권은 이영희 선생의 평론집인 『전환시대의 논리』(창작과 비평사. 1974)이다.

1979년에 읽은 이 책은 1991년에 일어난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이 일어났을 때 다시 꺼내 읽었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번 계엄사태에서 ‘계엄은 계몽’이라는 내란 우두머리의 말에 하도 기가 막혀 ‘거짓이란 어떤 것인가’를 다시 생각하며 읽었다.

책이 나온 지 45년 동안 3번 읽었다. 책 각 쪽의 가장자리는 싯누렇게 변했고 쪽을 잘못 넘기면 종이가 바싹 마른 낙엽처럼 부스러진다. 이 책은 참으로 오랫동안 내 의식과 동거한 고마운 벗이었다.

‘드레퓌스 사건(Dreyfus Affair)’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프랑스를 휩쓸었던 군국주의와 반유대주의, 맹목적인 애국주의 등 때문에 유대인 프랑스 대위가 간첩혐의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게 된 사건이다.

무죄를 주장하는 양심적인 지성인들의 재심파와 유죄를 주장하는 반유대주의가 결렬하게 대립한 정치 스캔들이었다. 1894년 시작해 1906년에 끝난 사건으로 이 때문에 프랑스의 여론은 극단적으로 갈라져 거의 내전상태에 다달았다.

프랑스군 참모본부에 근무하는 한 장교가 독일에게 군 기밀을 팔아먹다가 꼬투리가 잡히자 유대인 ‘드레퓌스’에게 죄를 뒤집어씌운 사건으로 프랑스 내 거센 반유태인 정서가 끼어들어 ‘드레퓌스’는 꼼짝없이 범인으로 내몰렸다.

하지만 진실을 아는 극소수 사람들의 끈질긴 양심투쟁으로 ‘드레퓌스’는 12년 만에 무죄가 된다.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Emile Zola; 1840〜1902)'도 무죄석방운동에 나섰다.

지식인으로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억울함에 뛰어들어 허위와 모든 힘을 쏟아 싸우는 사람들을 ’지성인‘이라 한다. 사회학자 칼 만하임은 지성인을 ‘사회의 파수꾼(Wächter)’이라 불렀다.

어느 시대나 지식을 자신에게만 쓰는 곡학아세 지식인은 넘쳐났다. 그러나 사회의 파수꾼 역할을 하는 '지성인'은 어느 시대나 귀했다.

드레퓌스의 무죄를 확신하고 반유대정서에 호통을 친 에밀 졸라의 격문 「나는 고발한다!」는 정의와 양심의 너무나 거대한 사자후로써 프랑스의 '지성인'을 대표하는 글이 되어 인류에게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남았다.

앞에서 언급한 세 사건 가운데 두 건은 마무리를 짓지 못했고 한 건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재심으로 24년 만에 무죄를 받았으나 핵심 가해자였던 담당검사 곽상도는 어떤 불이익도 받지 않았고 버젓이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천안함은 3천억 원에 달하는 잠수함 탐지를 비롯한 해상경계 임무를 수행하는 값비싼 초계함이었다. 불과 30억 원으로 추정되는 이른바 ‘북괴’ 소형 잠수함의 어뢰에 격침을 당했다고 주장했다.

어불성설이다. 만약 정부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함장을 비롯해 해군 수뇌부들이 영창에 가야 마땅했다. 보잘 것 없는 배에 격침(?)당했으면서도 함장을 비롯해 해군 수뇌부들은 TV에 당당히 나와 오히려 격침당한 것을 자랑하는 기자회견까지 했다.

군인들이 계엄으로 야당과 불순분자들을 계몽하려 했다는 대통령의 치졸한 거짓은 지금 진행 중이다. 하지만 계엄사태를 통해 ‘계엄이 곧 계몽’이라는 어거지는 나에게 ‘진실과 허위’를 더 깊이 생각하라는 문제를 던져주었다.

‘드레퓌스’ 사건에 개입한 ‘반유태인’ 정서는 지금 남한사회에서 사회적 문제가 생기면 툭하면 ‘빨갱이 소행’으로 몰아치는 작태와 다를 바가 한 치도 없다. 책 『드레퓌스』는 지금은 절판이 돼 쉽게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길지만 요약했다.

Ⅰ. 사건의 발단

1894년 9월 프랑스 참모본부 정보국 요원이 독일대사관에서 몰래 빼내온 문서에서 프랑스의 기밀을 독일로 빼돌리는 간첩이 프랑스 참모본부에 있다는 게 드러났다.

정보국에 근무하는 ‘에스테라지’라는 프랑스 장교는 방탕한 생활을 하다 돈이 필요해 독일에 정보를 팔아먹다 꼬리가 잡힌다. 에스테라지는 정보국 내 장교 앙리 중령과 공모해 문제의 문서필체를 유대인 장교의 필체로 둔갑시킨다.

범인으로 내몰린 사람은 육군 포병대위 알프레드 드레퓌스(Alfred Dreyfus; 1859〜1935)였다. 재판에서는 글씨체가 첩보문서와 드레퓌스의 것이 다르다는 이의 제기가 있었으나 글씨체를 일부러 바꿀 정도로 노련하다는 누명을 덧씌우고 막무가내로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확정했다.

드레퓌스는 프랑스 군인이었지만 보불전쟁에서 독일에 빼앗긴 알자스 출신의 유대인이었다. 유대인 드레퓌스에게 죄를 덮어 씌워도 어느 누구도 편들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범인들은 노렸다.

1894년 12월 군사법정은 드레퓌스에게 반역죄로 종신형을 언도하고 군적까지 치욕스럽게 박탈했다. 무죄를 외치는 드레퓌스에게는 "유태인을 죽여라"라는 군중의 소리만 되돌아왔다. 드레퓌스는 1895년 2월 남아메리카 외딴 섬인 악마 섬으로 유배당했다.

1896년 3월 프랑스 장교 조르주 삐까르는 참모본부 정보국으로 발령받고 자신과 인연이 있는 드레퓌스의 사건을 다시 들여다봤다. 자세히 사건을 살펴보니 드레퓌스가 누명을 쓰고 있다는 걸 알았다. 독일 대사관에서 발견한 기밀서류 글씨는 에스테라지 소령의 필체였다. 삐까르는 참모본부에 사실을 알렸다.

그러나 군사법정은 1898년 1월 열린 재심에서 진범 에스테라지 소령은 무죄라고 판결했다. 드레퓌스가 범인이라는 것을 확정하기 위해 에스테라지의 거짓 주장을 눈감아주었다. 드레퓌스를 진범으로 지목할 경우 군부의 체면을 구기기에 진실과 상관없이 드레퓌스를 범인으로 몰고 갔다.

그러나 문서를 조작한 앙리 중령이 자살하며 사건은 반전을 맞는다. 1899년 고등법원이 재심 진행을 결정하고 6월 10일 드레퓌스는 유배지인 악마 섬에서 나온다. 1904년에 재심이 청구돼 1906년 최고재판소에서 드레퓌스에게 무죄가 선고됐다. 군에 복귀해서 드레퓌스는 최고 훈장까지 받았지만 사건의 충격으로 평생 마음의 상처를 갖고 살았다.

Ⅱ. 사건의 배경

이 사건이 있기 전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보불전쟁(1870~1871)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독일은 프랑스로부터 알자스-로렌 지역을 빼앗으며 통일 독일을 이루었다. 알퐁스 도데의 단편소설 「마지막 수업」의 무대가 이 지역이다. 패배한 프랑스는 독일에 대해 감정이 험악했다.

19세기 말 전 유럽에 반유대주의가 널리 퍼졌다. 특히 프랑스는 반유대 정서가 강한 가톨릭 국가여서 반유대주의가 독버섯처럼 자랐다.

강력한 군사력만이 프랑스를 독일의 위협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고 믿었다. 궁극적인 파멸의 두려움과 복수심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프랑스 국민들은 군국주의자와 반유대주의를 외치는 가톨릭교도에게 표를 던졌다.

드레퓌스의 유죄를 주장하는 세력은 가톨릭교회와 군부, 대다수 보수언론이었고 무죄를 주장한 그룹은 개신교와 지식인, 소수의 언론이었다.

이 두 그룹이 적대적으로 갈려 프랑스 사회의 분열은 극에 달했다. 이 사건이 연상되는 헨리크 입센의 연극 「민중의 적」이 공연될 때는 관객들이 난투극을 벌일 정도였고 가족들은 밥상 앞에서 토론을 벌이다가 밥상이 엎어지는 일들이 다반사였다.

Ⅲ. 사건의 진행

이 사건에서 진실과 허위의 문제가 부각되었다. 여기서 진실은 하나의 당위로서가 아니라 싸워서 찾아야 할 구체적 행동이었다. 프랑스 국민의 압도적 다수는 '국가'와 군대를 맹목적으로 믿었고 민주주의가 안전을 보장할 능력이 있다는 믿음에 발작을 일으킬 정도로 불신했다.

"정의란 말을 입 밖에 내는데도 영웅적인 용기가 필요했다. 권리의 침해에 대한 항의는 범죄행위였으며 군법회의의 무과실성에 대한 의혹은 반역행위로 간주했다." 19세기 말 프랑스 사회의 분위기가 이랬다.

유대인 드레퓌스에게 독일 간첩이라는 무거운 죄명을 씌우고 프랑스 대부분의 언론은 이 거짓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였다. 이 잊힌 사건을 진실에 충실한 한 성실한 사람이 다시 점화했다.

새로 정보국에 부임한 삐까르 소령은 개인적으로는 유대인 드레퓌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무고한 사람이 억울한 죄를 쓰고 고통당하는 것을 가만히 보지 않았다. 삐까르의 용기에 양심적인 공화주의파 정치인들, 문인들, 법률가들이 드레퓌스를 위해 재심을 요구하는 활동을 벌였다.

프랑스 국민이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받아들이고 나서는 진실을 발견해도 소용이 없었다. 진실을 위해서 싸우고 있던 불과 몇 명 안 되는 사람들은 모욕과 저주를 받았으며 경멸과 때로는 육체적 테러까지도 감수했다.

'정신과 영혼의 거인'들은 이 싸움을 이끌고 나갔다. 진실만이 모든 사람의 안전을 도모해줄 수 있다고 주장한 삐까르 소령은 고결하고 아름다운 인격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하지만 반유대주의 신문들은 드레퓌스를 ‘안보적 위험인물’로 부당하고 난폭하게 몰아갔다. 오늘 우리의 조선일보가 ‘광주 5·18’ 북괴군 운운하듯이 말이다.

Ⅳ. 용납할 수 없는 어리석음

군부는 참모본부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보다 유대인이 범인이라는 확신을 심는 게 가장 바람직한 해결책이었다. 진실과 관계없이 여론은 양분돼 서로 큰소리로 싸웠다. 시끄러워진 드레퓌스 사건을 유야무야할 경우 내각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법정에 세우는 수밖에 없었다.

군부는 유죄를 인정할 수 있는 증거를 조작했다. 독일 대사관에서 입수한 문서를 복사한 것과 드레퓌스가 쓴 문서를 갈기갈기 찢었다. 찢은 것들을 섞어 드레퓌스에게 감별하라고 했다. 드레퓌스는 입수한 문서와 자신의 문서를 정확히 가려냈다. 그러자 군부는 필체를 다르게 쓸 정도로 노련한 스파이로 몰았다.

드레퓌스가 지루한 심문과정에서 단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바로 그가 영리할 뿐아니라 초범죄자적 정신구조를 가지고 있다는 증거라고 검사들은 말했다. 보통 범죄자라면 경찰에서 심문을 당하면 양심이 되살아나는 법인데 드레퓌스는 이런 양심이 결핍돼 있는 도덕적 불구자라고 단정했다.

대부분의 언론은 드레퓌스에 대해 터무니없는 거짓을 보도했다. 드레퓌스는 이탈리아 여인과 연애를 했다는 등, 독일 귀족과 러시아 페테르부르그에서 목격됐다는 등 드레퓌스의 인격을 갉았다. 130여 년 전 프랑스 언론을 지금 조선일보가 잘 보여주고 있다.

언론은 이런 식으로 범죄를 은폐하는데 익숙했다. 이름도 얼굴도 없는 인물을 내세워 자신들에게 적대적인 사람을 몰아부치는 ‘인간 사냥꾼’인 언론의 통상적인 모습이었다. 따라서 언론은 법의 간섭을 받지 않고 인권을 유린하는 인간사냥을 ‘국가안보’라는 궤변으로 쉬쉬함으로써 귀찮은 간섭에서 자유로웠다.

Ⅴ. 진실로 향하는 행진

진실이란 항상 맹종자들에게는 붉은 헝겊조각처럼 자극적인 법이다. 맹종자들은 거짓을 받아들임으로써 진실의 두려움으로부터 도피한 사람들이다. 편견에 깊이 물든 사람에게는 어떤 거짓도 진실로 보일 수 있는 것이다. 진실은 맹종자들을 다시 이성의 세계로 끌어들이는 안내자다.

군국주의 맹종자들은 독일에 위협당하는 ‘국가안보’의 관점에서만 생각했다. 인권은 철학적 몽상으로 보았다. “내게 있어서는 국방상과 참모총장이 진실이라고 말하면 진실일세.” “군이 법보다 위에 있으며 목적을 위해서는 거짓이 무슨 상관이람.”

진실에 다가가는 행군자들은 말한다. “진실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나는 소리를 쳐서 미치광이들이 범하고 있는 불쌍한 오류를 지적하겠소.” “나는 절대로 믿어요. 내 믿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아요.”

“조용한 침묵은 불리합니다. 침묵은 죽음입니다. 드레퓌스는 무죄이니까요.” “법은 누구에게나 평등하여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동등한 법의 보호나 처벌을 받아야 합니다.”

Ⅵ. ‘지성인’ 에밀 졸라의 탄생

진실을 외치는 소수의 목소리는 마침내 들으려는 사람의 귀에 도달했다. 「마지막 수업」의 알퐁스 도테는 “작가란 시끄러운 인간세사에 개인적으로 연루되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프랑스의 대문호 에밀 졸라는 달랐다. “드레퓌스에게 죄를 주는 것은 좋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합법적으로 하라.”

에밀 졸라는 격랑의 한 복판으로 뛰어들었다. 졸라는 과도한 유태인 감정을 의심쩍어 하면서 바라보았다. 졸라는 과학적 사고로 종교적 편견과 미신을 종식해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었다.

유럽 최고의 문명국에서 그 편견이 가장 저열한 형태로 나타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죄인이라 해도 드레퓌스가 그런 모욕을 받는 것에 졸라는 역겨움을 느꼈다. 드레퓌스가 결백하다는 것을 알자 희생자에게 깊은 동정에 보냈다.

졸라는 문학적 업적의 최후를 장식하기 위해 위대한 신념행위에 참가하기로 했다. 젊은이들에게 진실과 정의에 대해 등을 돌리지 말 것을 경고했다. 사기꾼 에스떼라지가 칭송되고 진실한 삐까르가 악당 취급되는 시점에 이르자 졸라는 단호한 신념의 증인(순교자)만이 이 나라를 뒤덮고 있는 광기를 깨뜨릴 수 있음을 깨달았다.

진실을 위한 투사들 사이에 흐르는 낙담을 느끼고서 그는 자신이 나설 때가 닥친 것을 간파했다. 졸라는 「나는 고발한다!」라는 드레퓌스의 결백을 주장하는 글을 대통령에게 보냈다. 대문호다운 글이 내포하고 있는 무서운 힘이 폭발했다. 이 글은 국제사회에도 널리 퍼졌다.

"대통령 각하. 바로 이렇게 해서 오판이 저질러졌습니다. 게다가 드레퓌스의 도덕성, 부유한 환경, 범죄동기의 부재, 끝없는 무죄의 외침은 그가 뒤파티 소령의 기발한 상상력, 그를 둘러싼 종교적, 환경, 우리 시대의 불명예인 '더러운 유태인' 사냥 등의 희생자였음을 더욱 확신하게 합니다.(중략)

저는 그토록 큰 고통을 겪은 인류, 바야흐로 행복추구의 권리를 지닌 인류의 이름으로 오직 하나의 열정, 즉 진실의 빛에 대한 열정을 간직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의 불타는 항의는 저의 영혼의 외침일 뿐입니다.(중략)

우리는 군대를 사랑하고 존경합니다. 그러한 군대가 내일이라도 우리를 짓누르게 될 정복자로 군림한다면 문제는 심각합니다.

저열한 경찰근성, 지긋지긋한 수단이 이 광적이고 우매한 사건에 동원되었는지. 이들은 그들의 발꿈치로 국가를 짓이기고 ‘국가이익’이라는 거짓 미명하에 터져 나오는 진실과 정의의 외침을 목구멍 속으로 도로 막아 버렸습니다.(중략)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의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것입니다.”

이 글이 신문에 공개되자 반드레퓌스파는 졸라의 기사를 길거리에서 불태우기도 하고 군중을 선동해 유대인에게 테러를 가하기도 했다. 일상 속에서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말다툼과 주먹다짐은 예사였다.

파장이 증폭되자 프랑스 군부는 에밀 졸라가 군법회의를 중상모략했다는 이유로 징역 1년을 선고했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반유대주의 감정으로 드레퓌스에 대한 폭언을 일삼았다. 에밀 졸라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영국으로 망명했다가 1899년 다시 귀국해 사건이 종식될 때까지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프랑스의 가장 용감한 사람들은 에밀 졸라가 지적한 무서운 갈등에 격앙돼 이해와 감정을 초월해 똑같이 고상한 감정을 갖고 어둠 속에서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애국심은 정의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조국을 필요로 했다.

Ⅶ. 사필귀정

드레퓌스를 모함했던 앙리 소령은 재심이 열리자 자살했다. 1899년 드레퓌스는 유배지인 악마의 섬에서 풀려나와 특사로 사면받았다. 1902년 9월 에밀 졸라는 드레퓌스의 무죄를 보지 못하고 의문의 사망을 했다.

이전에 지식인은 단순하게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엘리트 계층으로 사회에서 대접을 받는 존재였으나 에밀 졸라의 양심에 따른 정의로운 주장으로 지식인의 개념도 변했다. 즉 지식인은 사회를 올바른 방향으로 개선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며 잘못된 것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실의 행진에 역시 큰 발자취를 남긴 정치인 클레망소(Georges Clemenceau; 1841〜1929)는 에밀 졸라를 이렇게 추모했다.

“다수에 저항하고 그릇된 길에 이끌린 대중 가운데 홀로 깨어 있는 사람은 드물다… 갈기갈기 찢긴 프랑스에서 사상을 매개로 한 혁명이라 할만했던 그 정신의 평화로운 저항에 첫 신호를 보낸 영광은 졸라에게 돌려져야 한다. 이 반항은 행동을 통한 혁명으로 발전했다.”

1906년 6월 프랑스 최고재판소는 드레퓌스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12년만에 사건은 사필귀정으로 끝났다.

드레퓌스 사건은 아무런 구체적인 토대가 없는 추상적인 이념의 갈등이었다. 편견은 판단기능뿐만 아니라 지각능력까지도 마비시켰다. 편견이 현실을 선입관에 맞게 왜곡시켰다. 지금 우리 현실은 130여 년 전 프랑스의 갈등을 반복한다는 느낌이 든다.

Ⅷ. 드레퓌스 사건과 관련한 관련자와 당대 양심인의 어록

“나는 궁극적 승리에 조금이라도 절망하지 않습니다. 더욱 강력한 신념으로 거듭 말합니다. 진실이 행군하고 있고 아무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음을! 진실이 지하에 묻히면 자라납니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에밀 졸라

“국가 이익이라는 그것은 오늘 드레퓌스를 치고 있지만 내일은 다른 자를 칠 것입니다. 그것은 이성을 잃고 공공의 이익이라는 명분아래 반대자를 비웃으며 쓸어버릴 것이고 군중은 겁에 질린 채 쳐다만 볼 것입니다.” - 클레망소

“나는 이 사건이 위험수위에 이르러 막 터지기 시작하는 여러 도덕적 위기 가운데 하나라고 봅니다.” - 미국 실용주의 사상가 ‘월리엄 제임즈’

“졸라는 재판의 잘못만을 폭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프랑스의 사회정의, 공화국의 이념, 자유정신을 질식시키기 위해 손을 잡은 모든 폭력적‧억압적 세력의 음모를 백일하에 드러냈습니다. 그의 대담한 언어는 프랑스를 잠에서 깨어나게 했던 것입니다.” - 프랑스 작가 ‘아나톨 프랑스’

“심한 역경도 때로는 그 목적이 있다. 프랑스가 양심문제로 진통하고 있는 것은 프랑스를 위해 좋은 일이 될 것이다.” - 톨스토이

“나는 졸라를 향한 깊은 존경과 가없는 찬사에 사무쳐 있다. 잔다크와 졸라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 - 미국 소설가 '마크 트웨인'

“당신(드레퓌스)은 또 고통을 당하셨고, 우리는 또 울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는 정말 더 이상의 고통도 울음도 없을 겁니다. 진실의 깃발은 죽음의 지하감방에서 신음하던 당신의 손에 쥐어졌고 울부짖는 야수들의 머리 위에 휘날리기 시작했습니다.

순교자님, 이제 고통은 끝입니다. 주위를 보십시오. 멀리 가까이, 모두가 당신 편이며 당신을 위해 비겁함과 거짓과 망각과 싸우려는 사람입니다. 그 중 한 사람이 저 사라 베른하르트입니다.” - 여배우 ‘사라 베른하르트’

Ⅸ. 우리가 배워야 할 교훈

나라마다 역사의 전개과정이 다르거나 특성이 있다. 그럼에도 역사발전에는 보편적인 또는 궁극적인 진실이 엄존한다. 역사의 무대는 다르지만 역사의 원리는 같은 뿌리이다.

드레퓌스가 외딴 섬에서 억울한 죽음을 맞지 않고 진실에 따라 세상에 알려진 것은 사회에 살아있는 소수의 양심세력과 깨어있는 언론, 올바른 가치를 일깨우는 종교 때문이었다. 프랑스는 12년에 걸친 이 사건을 겪으며 보수세력과 진보세력의 끝없는 투쟁에 홍역을 치렀다. 또한 유대인이라는 다른 종족에 관용과 다양성이라는 포용력을 얻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떠한가? 대통령을 탄핵하느냐 마느냐로 온 나라가 뒤죽박죽 들끓고 있다. 프랑스의 드레퓌스 사건이 일어날 때와 비슷한 양상으로 가고 있다. 75년 전 한국전쟁으로 남북의 동족상잔이란 참상이 일어났는데, 게다가 우리는 동서로 갈등하며 끝모를 갈라치기를 하고 있다.

진정 우리가 상식과 공정이라는 이성의 힘을 따른다면 이 혼란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드레퓌스 사건의 교훈을 우리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하리라!

** 참으로 귀중한 책이 절판돼 대단히 안타깝다. 내가 이 『드레퓌스』란 책을 읽고 난 뒤 겪은 위 글 서두의 3가지 사건을 우리 사회는 단 한 건도 해결하지 못하고 시간의 물결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다. 계엄을 계몽이라 부르는 이 천박한 생각을 이성의 칼로 언제쯤 끊어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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