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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고시 필기시험을 몇 주 앞두고 본가에 잠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다시 전주로 내려가는 길이었다. 멀미 때문에 버스를 못 타지만, 이상하게 기차에서는 멀미가 나지 않아 수년째 애용하고 있고, 평소 그랬던 것처럼 같은 시간대에 객차 끝 창가자리 KTX를 예매해두었다. 그런데, 열차에 올라서니 내 자리에 웬 중년의 남성분이 곤히 주무시고 계셨다.
평소 입석표를 예매한 승객들이 빈 좌석에 앉는 경우가 종종 있기 때문에 나는 그 분을 깨워 내 자리임을 알렸고, 그 분은 사과와 함께 소지품을 한껏 싸들고 자리를 비켜주셨다. 자리에 앉아가던 중 10분 쯤 지났을까. 이번엔 반대로 그 남성분께서 다시 돌아와 나를 조용히 깨우더니 뭔가 이상한 것 같다고 하는 것이다. 열차 좌석이 중복으로 예약된 것 같다는 얘기였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여 예매한 표를 확인하려고 곧바로 코레일 앱을 켜는 순간,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예매한 표는 2시간 전에 이미 떠났고, 엉뚱한 사람을 깨워 자리를 뺏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그 자리에서 90도 인사를 연신 거듭하며 정신없이 짐을 빼는데, 아저씨는 괜찮다며 허허 웃으시곤 다시 처음과 같은 자세로 주무셨다. 곧바로 승무원을 통해 새로운 자리를 결제하였고 전주로 가는 내내 너무나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예전 의학계열 MMI 면접에 이런 문제가 있었다. ‘교수님이 수업 중 A라는 내용을 강의하시는데, 본인이 생각하기에 해당 내용은 교과서와 달랐다. 어떻게 이 사실을 알릴 것인가?’ 라는 내용이었다. 그 문제를 해석할 당시에는 지도교수님의 권위를 지키고 예의를 갖춰 행동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이해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스스로의 생각이 틀릴 수 있음을 인지하는 자세가 훨씬 중요함을 강조한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전주로 내려오는 기차에서 내내 생각했다. 평소 의견을 말할 때 ‘~수도 있다’를 반복하지만, 이는 틀렸을 상황에 대한 탈출구를 열어놓는 행위이지 진정으로 스스로 틀릴 수 있다고 생각하여 뱉어온 말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이번 해프닝을 계기로 여태껏 말로만 틀릴 수도 있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자기 확신에 빠져 살진 않았는지 다시 한번 반성하게 된다. 더 나아가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이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을 품고, 매사 겸손한 자세로 세상을 살아가야 함을 떠나보낸 기차표와 1.5배의 KTX 부가운임으로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아마 나에게 자리를 비켜주셨던 분이 이 글을 읽으실지 모르겠지만, 이 글을 빌어 다시 한번 사과드리고, 덕분에 스스로 반성할 수 있는 계기를 얻어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다.
※ 이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