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잘하는 정부의 조건

2025-04-07

우악스럽게 주먹을 휘두르는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 우리에게 도와달라 할 게 있다니 그나마 다행이다. 조선업 얘기다. 식민지를 거쳐 전쟁까지 치른 1960년대의 대한민국이 조선소를 짓고 배를 만들어 해외에 팔겠다는, 대담하고도 무모한 궁리를 했던 덕분이다. 이때 고국의 미래를 위해 해외에서 귀국한 과학자·공학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후 스토리는 아시다시피다. 제철, 석유화학, 엔지니어링 산업과 조선업이 시너지를 내며 한국은 무섭게 성장했다.

그땐 어떤 산업을 육성할지 기획하고 실행하는, 설계자로서 정부 역할이 중요했다. ‘일본 공산품을 수입해 쓰면 되니 한국은 농업에 집중하라’는 미국의 압박 속에서 외화를 조달해 기술 자립을 도모하는 건 기업가의 도전정신만으론 다 설명하기 어렵다.

미국과 중국에 치이는 한국 경제

신산업 육성 및 구산업 재편 숙제

고난도 문제 풀 새정부 역량 절실

60년 후 2025년의 한국에선 산업 정책의 난도가 더 높아졌다. 3년여 만에 다시 대선을 치르게 된 요즘, 유력 대선 주자들은 화려한 경제 공약들을 준비하고 있을 터다. 하지만 눈앞의 현실은 그 어느 때보다 황량하다. 중국과의 경쟁이 거의 모든 산업의 상수(常數)가 된 데다 자유무역 시대마저 끝나가고 있다. 정부가 미래 성장 동력에 씨 뿌려야 하는 건 기본이요, 위기에 처한 산업에 칼을 대 기업의 활력을 북돋는 구조조정도 해야 한다.

지금 세계는 그걸 가장 잘하려는 정부들의 경쟁 무대다. 한국의 조선업이 그러했듯, 대만은 미국 교포인 모리스 창을 모셔와 반도체 위탁생산 기업 TSMC를 키웠고 미국과 협상 카드로 활용하고 있다. 지난 30년을 되짚어본 일본 정부는 반도체 산업 부활을 위해 대기업 8곳과 함께 출자한 반도체 기업 라피더스를 육성 중이다. 트럼프 정부의 관세 전쟁 역시 미국의 망해버린 제조업을 되살리겠다는 명분에서 출발했다. 산업을 키우는 덴 무심하고 미국 기업 때리기에만 골몰하던 유럽은 이 무대의 변방으로 밀려났다.

이렇게 치열한 시기에, 한국은 계엄과 탄핵의 소용돌이에 빨려 들어가 4개월을 허송세월했다. 급하게 풀었어야 할 숙제가 쌓였다. 산업계에선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이 그런 숙제였다. 석유화학은 석유제품에서 화학제품 원료를 뽑아내는 중간재 제조업으로, 1970년대 이후 한국 경제의 한 축이었다. 지금도 반도체, 자동차, 기계, 철강과 함께 주력 산업이다.

그러나 지금 석유화학 기업들은 암울하다. 2010년대 중국 특수를 쫓아 나프타분해시설(NCC) 같은 범용 제품 설비를 대거 증설한 한국 석유화학 기업들은 오판의 대가를 치르는 중이다. 중국이 석유화학 자립도를 높이고 수출에까지 나서자 한국 제품이 팔리지 않는 것이다. 당장 지난해의 적자만 문제가 아니라, 이대로는 앞으로도 미래가 없다는 게 문제다. 누군가는 망해야 생산량이 조절될 텐데, 먼저 망하는 기업이 내가 될 순 없으니 다들 버티고 있다. 그래서 기업들은 정부의 ‘칼날’을 기다렸다. 대신 수술을 좀 해달라고.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계엄 사태 이후 정부가 석유화학 산업 경쟁력 제고 대책을 발표했지만 자율 구조조정에 초점을 맞췄다. 직접 수술까지 하지는 않겠다는 거다. 국무총리, 경제부총리 등에 대한 줄탄핵이 이어지며 정부의 힘이 빠르게 빠진 탓이었을까. 2016년에도 그랬다. 박근혜 정부가 석유화학 경쟁력 제고 방안을 발표한지 한 달 만에 국정농단 사태가 터졌다. 이후 석유화학 구조조정은 흐지부지됐다.

구조조정은 시기가 중요하다. 공적 자금을 투입할지 말지, 어느 기업을 살리고 어느 기업을 망하게 둘지 빠르게 결정하고 실행해야 한다. 제 몸에 칼 대기는 힘들기에 정부가 욕먹을 각오를 하고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과감하게 조정해야 끝난다.

그렇다고 과감하기만 해서는 안 된다. 갈등을 섬세하게 조정하는 리더십도 필요하다. 산업 재편 과정에서 일자리를 잃게 될 사람들과 갑자기 공장 문이 닫힌 지역 경제에 미칠 영향까지도 고루 살펴야 한다. 특히, 산업의 특성을 이해하고 칼을 휘둘러야 한다. 지난 2016년 세계 7위이자 국내 1위 해운사 한진해운을 파산의 길로 보낸 산업은행의 결정은 이후 산업적 이해가 부족했다는 아쉬움을 남겼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세계 1위 해운사의 몰락은 중국과 수출 경쟁에도 영향을 미쳤다.

새 정부의 얼굴이 되고 싶다는 이들은 밀린 숙제를 할 준비가 되어 있을까. 한동안 장밋빛 공약이 쏟아지겠지만, 가장 어려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건지를 중심으로 검증하자. 거기서 진짜 실력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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