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헌법재판소의 윤석열 전 대통령 탄핵 심판 이후 정국의 불확실성이 해소되면서 대한민국 역사는 한 국면을 넘기게 됐다. 국민적 혼란과 불안은 일단 멈췄고 이제 정치·경제·사회문화 전반의 회복력을 보이는 데 온 힘을 모을 때다. 책의 새로운 페이지, 새로운 챕터를 쓸 게 아니라 책을 새로 내야 할 만큼 전면적 혁신이 필요한 분야가 한둘이 아니다. ‘열전’과 ‘방치’의 불균형이 극심했던 미디어·정보통신기술(ICT) 분야 역시 거버넌스를 다시 세워 회복력을 키워야 한다.
지난주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관철시킨 비관세 장벽은 미디어·ICT 문제가 왜 중요한지 하나의 힌트를 제공한다. ‘협상용 카드’라고 해도 방송·통신 분야의 7가지 항목을 무역장벽으로 열거한 것은 적어도 미국이 한국의 미디어 시장과 ICT 산업에 영향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다.
문제는 한국이 패권국의 위협에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만큼 탄탄한 정책 철학과 영리한 실행력을 갖췄느냐다. 적어도 최근 수년 사이 방송·통신 분야의 거버넌스 역할을 보면 답하기 어려운 형편이다. 방송·통신 융합 환경에 기민하게 대처하자는 취지에서 출범시킨 방송통신위원회는 정파 간 기싸움에 식물로 전락한 지 오래다. ICT 분야의 기술 선도와 이슈 대응도 민첩하지 못했다. 과거 정보통신 강국으로 존재감을 뽐내던 한국의 위상은 없고 인공지능(AI) 경쟁력 순위에서 변방으로 밀려날까 우려할 지경이다.
8년 전 이맘때도 대통령 탄핵안이 헌재에서 인용되며 조기 대선이 열렸다. 속전속결의 과정에서 새 정부는 인수위 없이 출범했고, 그러다 보니 미디어·ICT 분야의 누적된 과제 역시 충분한 개선의 기회를 놓친 채 지금껏 흘러왔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개선과 혁신의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도록 분야별 과제와 쟁점을 미리 챙겨보면서 지혜로운 대안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개인적으로 공익성과 산업성의 두 차원으로 미디어·ICT 분야를 명확히 나누고 각각에 걸맞은 정책을 검토하는 작업부터 해나가는 게 필요하다고 본다. 디지털·AI 시대에 미디어의 공익적 가치는 더욱 중요한 만큼, 능동적으로 책임을 이행할 수 있도록 재원 고민이나 정치적 외풍에 휘둘리지 않는 견고한 거버넌스를 재구축해야 한다. 공영방송과 보도채널 등 공적 미디어의 역할 제고와 위상 복원이 미뤄지면 지금처럼 각종 음모론과 허위 조작 정보가 판치게 된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의 유튜브 뉴스 이용률(53%)이 세계 평균(30%)을 크게 웃돌고 유튜브를 비롯한 소셜미디어를 언론으로 인식하는 비율은 90%에 육박한다. 이것이 한국적 특징이라면 그 특징에 걸맞은 특별법도 검토할 수 있다. 지금처럼 성긴 법에서 유튜브는 방송도, 언론도 아닌 채 규제로부터 자유를 누리고 있다.
변화무쌍한 글로벌 환경에서 국내 방송·통신 산업이 능동적으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산업의 파이를 키우고 활성화하는 육성·진흥 정책이 적극적으로 검토돼야 한다. AI 기술이 크게 발전하면서 누구나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시대를 열었다. 미디어에 대한 개념 정의부터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같은 부분 역시 정교하게 담아낼 필요가 있다. 아날로그 기반의 정책은 털어내고 디지털 기반의 미래지향적 정책 방향으로 재설계돼야 한다.
이처럼 명확한 답을 내고 힘 있게 추진하는 것은 당연하다. 헌재가 주문한 ‘정치의 복원’이 정치에 한정된다는 이야기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