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5-요동치는 통상질서
여한구 전 통상교섭본부장 인터뷰

[주간경향] “납득하긴 어렵지만, 협상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다를 수 있다.” 트럼프 1기 행정부 때 주미한국대사관에서 상무관으로 근무하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에 참여하고 2021년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낸 여한구 미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PIIE) 선임위원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에 25%라는 높은 관세율을 부과한다고 발표하자 이같이 밝혔다. 그는 “정치적 리더십의 공백으로 정상 간 외교 채널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라며 “이제는 절대적 손익이 아니라 상대적 게임의 문제”라고 말했다. 경쟁국 대비 유리한 조건을 선점할 수 있도록 협상 전략을 새롭게 짜야 한다는 설명이다.
일각에서 제기되는 ‘트럼프 4년만 버티면 된다’라는 시각에 대해서도 선을 그었다. 여 선임위원은 “이번 조치를 트럼프 개인의 특수성에 따른 일회성 변수로 보기 어렵다”라며 “보호무역주의와 공급망 재편은 이미 뉴노멀로 자리 잡은 흐름이며, 트럼프 이후에도 지속될 가능성이 크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단기 대응을 넘어서 중장기적인 전략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주간경향은 지난 4월 1일과 3일 여한구 선임위원을 인터뷰했다.
-미국이 한국산 수입품에 25% 상호관세를 부과한다고 발표했다.
“예상보다 훨씬 높은 수준이다. 한국은 13년째 미국의 FTA 파트너국이며, 2023·2024년 2년 연속 미국의 최대 그린필드(생산시설·법인 설립) 투자국이었다. 그만큼 주요 산업에서 미국에 실질적으로 기여해왔다. 일본(24%), EU(20%)보다 높고, 동일하게 FTA를 체결한 아시아 국가인 호주와 싱가포르가 각각 10%에 그친 것과 비교해도 과도한 수준이다. 트럼프는 각국이 미국에 부과하는 관세의 절반 수준으로 상호관세를 매기겠다고 밝혔는데, 그가 공개한 차트에 따르면 한국은 미국에 50%의 관세를 부과하는 국가로 분류됐다. 사실 한국은 미국과 FTA 체결로 실제 관세율은 0%에 가깝다. 트럼프는 검역, 규제, 통화정책 등 비관세 장벽까지 종합적으로 고려해 상호 관세를 산정하겠다고 밝혀왔지만, 산정 기준은 이해하기 어렵다. 한국으로선 매우 납득하기 어려운 결정이다.”
-한국이 유독 불리한 상황인가.
“단기적으로는 기업들이 부담해야 할 관세 수준이 상당하지만, 그나마 FTA를 체결하지 않은 국가들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다. 상호관세는 기존 관세율 위에 추가로 부과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일본은 미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아 최혜국대우(MFN) 세율에 24%가 더해진다. 반면 한국은 FTA를 통해 기본 관세율이 0%이기 때문에, 여기에 25%가 추가되는 구조다. 또한 지금은 협상의 시작점이지, 종착점이 아니다. 앞으로의 협상에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 이제는 절대적 손익이 아니라 ‘상대적 게임’의 문제다. 우리가 경쟁국 대비 어떤 포지션에 서느냐가 핵심이다. 일부 품목에서 예외를 확보하고, 경쟁국이 그 혜택을 받지 못한다면 이는 분명히 우리에게 유리한 기회가 될 수 있다. 다만 한국에 25%의 관세가 부과된 배경에 실제 한·미 간 관세율이 무관세에 가까웠다는 점이 얼마나 반영됐는지는 불투명하다. 이번 결과는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들이 크게 작용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통제할 수 없는 변수는 무엇인가.
“계엄으로 인한 리더십 공백이다. 그간 장관이나 실무선에서 미국에 설득과 설명을 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현재 워싱턴의 정책 결정 구조는 ‘톱다운(top-down)’ 방식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종 결정을 내리며 실무 차원의 설득만으론 한계가 있다. 따라서 정상 간 직접 소통으로 트럼프에게 ‘한국의 대미 수입품 평균 관세율은 0.7%에 불과하다’라는 내용을 명확히 전달하지 못한 것이 아쉬운 대목이다. 정치적 리더십의 공백은 대외 협상뿐 아니라 국내 이해관계 조정에서도 큰 제약으로 작용한다. 특히 비관세 장벽과 관련된 협상은 외교 문제만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힌 국내 이해관계를 풀고 필요하다면 국내법 개정을 거쳐야 하는 고도의 정치적 과정이다. 조정과 타협이 필수적이고, 이를 가능케 하는 정치적 안정은 반드시 전제돼야 한다.”
-트럼프 당선 이후 불확실성이 극심해졌다.
“트럼프는 혼란을 조성하고 그 혼돈 속에서 지렛대를 만드는 리더십 스타일을 갖고 있다. 소위 ‘미치광이 전략’인데, 극단적인 메시지로 강하게 충격을 주고 혼란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협상의 종착점으로 이끌어가는 방식이다. 2017년 한·미 FTA 폐기 발언도 그랬다. 한국으로선 상상도 못 했던 시나리오였기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그 후 트럼프는 협상의 주도권을 쥐고, 결국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FTA를 개정하는 쪽으로 갔다. 우리 또한 초반의 충격을 전환해 그 혼돈 속에서 나름의 기회를 찾아냈다. 트럼프의 하루하루 발언에 반응하며 롤러코스터처럼 오락가락하다 보면, 정작 중요한 흐름과 맥락을 놓칠 수 있다. 협상의 출발점과 종착점은 다를 수 있으며, 초반 발언은 레버리지를 키우기 위한 ‘초기 포지션’일 가능성이 크다.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말고 전략적·구조적으로 해석하고 준비해야 한다.”
-정책 불확실성이 큰 상황에서, 미국에 장기투자를 감행하기보다는 고율 관세를 감수하고 트럼프 임기 4년을 견디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시각도 있다.
“기업으로서는 여러 가지를 고려한 전략적인 이슈가 있을 수 있다. 다만 이러한 흐름은 일시적인 변이가 아니라 뉴노멀이다. 설령 트럼프의 4년이 끝난다 해도 곧바로 미국이 자유무역·다자주의 체제로 복귀하긴 어렵다고 본다. 트럼프가 촉발한 보호무역주의와 정부 주도의 산업정책 흐름은 단순히 그의 개인적 정책이 아니라 시대적 조류로 굳어졌다고 봐야 한다. 이러한 흐름은 미국 정치 구조의 변화와 사회 전반에 깔린 저변의 흐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미국의 중서부, 특히 소외된 백인 노동자 계층의 분노와 좌절 그리고 이들의 정치적 재결집은 트럼프라는 현상을 만들어낸 가장 강력한 동력이다. 이러한 정체성과 계급 기반의 정치 움직임은 임기 이후에도 사라지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한 번 시대적 조류가 바뀌면 한 세대, 최소 20~30년간 지속하는 게 역사적 경험이다.”
-트럼프 정책에 대한 미국 내 피로감과 반감이 커지다 보면 이 같은 흐름이 약화할 가능성은 없을까.
“그렇지 않다. 3월 31일 발표된 미 하버드대 미국정치연구소와 여론조사기관 해리스의 공동조사에 따르면 등록 유권자의 49%가 트럼프의 국정 수행을 지지한다고 답했다. 트럼프는 1기 집권 당시엔 지지율이 30% 후반을 넘은 적이 거의 없었다. 전통적으로 핵심 지지층은 견고하지만, 확장성에는 한계가 있다는 평가가 일반적이었다. 지금은 다르다. 트럼프가 굉장히 과격한 정책과 돌출 행동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이 50%에 이른다는 건 결코 적은 수치가 아니다. 이는 미국 국민 사이에서 트럼프식 정치에 대해 강한 지지가 존재하고 있고, 혼란과 충격 속에서도 정책의 방향성에 동의하는 유권자층이 상당수 존재한다는 걸 보여주는 지표다. 선거운동 기간에 대규모 감세를 공약한 트럼프는 재원 확보가 어려운 상황에서 관세를 통해 세수를 확보하려고 한다. 외부에선 불합리해 보일 수 있지만, 미국 내 핵심 지지층과 유권자들 입장에선 ‘미국의 이익을 위한 조치’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있다. 트럼프의 정책들이 단순히 개인의 돌발행동이나 즉흥성의 결과물이 아니라 미국 내에서 민주주의적 정당성을 어느 정도 확보하고 있다는 점을 현실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한국의 대응 전략은.
“‘어떻게 피해갈까’를 고민하기보다 새로운 기회를 적극적으로 찾아야 한다. 일부 기업들엔 이번 상황이 오히려 기회가 될 수 있다. 중국에서 공급망을 이동하려는 미국 기업들이 한국과 일본 기업을 대안으로 접촉하는 사례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G2 의존도를 줄이기 위한 제3시장 다변화 전략도 요구된다. 미국과 중국이 한국 수출의 약 40%를 차지하지만, 나머지 60% 중 아세안과 인도는 이미 중국에 필적할 만큼 비중이 커졌고, 성장 가능성도 크다. 민관협력도 필요하다. 일본 소프트뱅크와 대만 TSMC가 각각 1000억달러 규모의 대규모 투자를 약속했는데, 국내 개별 기업이 이만큼의 투자를 하기는 어렵다. 각자도생식 투자 발표보다 정부와 기업 간의 조율을 통해 전략적 타이밍에 맞춘 공동 대응이 필요하다. 또 한국과 일본이 유사한 처지에 있는 만큼, 공동 협상 패키지를 구성하는 것도 방안이다. 트럼프는 알래스카산 천연가스(LNG) 프로젝트에 한국, 일본 등 주요 LNG 수요국의 참여를 요구하고 있다. 사실 경제성은 낮다고 보는데, 일본과 대만이 정치적 고려 속에 적극 참여하는 가운데 우리 정부도 참여를 검토 중이다. 한 국가가 리스크를 단독 부담하기보다 컨소시엄을 구성해 분담하는 방식도 고려할 수 있다. 한국은 장기적 시야로 공급망, 외교, 투자 전략을 전면 재설계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