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개발독재 체제 아래 신음하던 민중의 눈물을 닦아주던 종교가 기독교다. 하나 교회는 권력에 순응하며 개인의 성공은 이끌었지만, 사회의 구조적 모순은 외면했다. 이후 대중을 자본으로 보는 시장신학, 경영기법이 도입된 기업교회, 예수의 이미지와 말씀을 상품화한 천국경제가 뒤를 이었다.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을 추동하는 자본의 신을 숭배하게 된 것이다. 일찍이 발터 베냐민이 “기독교 자체가 자본주의로 변형되었다”고 한 말 그대로다. 욕망긍정의 신학이다. 일부의 극우 기독교인들은 이제 이 나라를 정교일치의 국가로 만들고자 광장으로 나온다. 혐오와 증오의 얼굴로 적을 찾으며, 온갖 욕설과 저주로 맑은 하늘을 오염시킨다.
정치의 사법화에 이어 정치의 종교화가 진행 중이다. 전자는 그나마 제도가 받쳐주지만 후자는 예측불허다. 극우 기독교는 ‘선지자’ 이승만이 추구했던 기독교가 통치하는 신정국가 창출을 목표로 한다. 현재 한국은 체제전쟁 중이다.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공산국가의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북한을 선제타격하는 출애굽 전쟁을 일으켜야 한다. 차별금지법 반대, 반무슬림, 난민과 이주민 반대, 세습교회 또한 전술이다. 법원 난동 사건에서 본 것처럼 터무니없는 저항권을 외치며 폭력을 정당화한다. 신도를 표로 계산해 대선과 총선, 시장과 군수 선거에도 개입한다.
독일이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은 세속화된 신학으로 무장한 전쟁이었다. 십자가 대신 하켄크로이츠, 예수와 같은 히틀러, 게르만 민족의 선민의식, 절대악인 유대인 처단 등. 만약 12·3 계엄이 성공했다면 그와 유사한 일이 이 땅에서도 일어나지 않았을까. 극우 기독교에 포위된 정치인들을 보면 기우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탄핵 반대 집회에서 “하나님도 내 손에 죽을 수 있다”는 신성모독 발언을 한 전광훈 목사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그들의 모습과 “공수처·선관위·헌법재판소를 때려 부숴야 한다”며 민주공화국 체제를 전면 부정하는 그들의 행태를 보면, 공포의 역사가 재현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익 기독교는 독자적인 신앙을 갖고 있다. 김진호 목사는 태극기는 애국 퍼레이드, 성조기는 구원자의 나라, 이스라엘 국기는 선민을 상징한다고 하며 이를 식민화된 신앙이라고 한다(<‘태극기집회’와 개신교 우파>). 근본주의에 기반한 미국 보수주의 신학을 이식한 한국 기독교는 자국을 분열로 몰아넣는 그들과 여전히 깊이 연결되어 있다. 배제와 비타협의 한국 정치는 자신을 파멸시킬 괴물을 잉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어떤 경전도 돈을 벌어 거대한 교회나 절을 세우라고 하지 않는다. 정치적 상대방을 쳐부수라고 지시하지 않는다. 국가를 지배해 권력을 행사하라고 한 적 없다. 그들은 종교소멸의 위기감에 처한 내부의 결핍을 리플리 증후군으로 해결하고자 한다. 보고 싶은 현실 이외의 것은 부정한다. 가상의 세계를 만들어 그것을 진실이라고 믿는다. 연속된 거짓말로 자신을 위로하고 주위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알뜰폰 장사를 한다. 군중을 도착된 맘몬(돈)의 종교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광활한 우주에서 과연 우리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수많은 지식도 거의 무에 가깝다. 하여 그들은 우리 자신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모든 종교의 교의와 조직은 영혼의 자유를 구가하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마약 같은 언설에 빠져 가던 길을 놓쳐서는 안 된다. 예수가 돈의 소굴이 된 성전을 채찍으로 정화하며, 헐어버리고 새로 짓겠다고 한 것은 하나의 우주적 존재인 자신의 참된 주인공을 회복하라고 한 것이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인다는 선종의 살불살조(殺佛殺祖)의 정신 또한 마찬가지다. 분별과 집착하는 마음을 놓으면 바로 부처다. 그때 평화는 종교가 되고, 양심은 신이 되며, 자비와 사랑과 은혜의 실천은 교리가 된다. 비로소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가 “주여, 저들을 용서해주소서. 그들은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한 말을 따라 파산된 영혼들의 적개심마저 감싸는 성인의 후예들이 될 것이다.
